HOME >> 사회 2004.12.02. 1831호
"佛 바칼로레아 준비 첫 교육기관 자부심"
불문과 교수로 시작, 25년째 한국 생활하는 수도자…국제학교 세워 프랑스식 교육 전파

▲ 프랑스 중·고교 과정교육 '하비에르 국제학교' 엘렌 르브렝 교장
서울 종로구 혜화동 주택가에 자리잡고 있는 하비에르 국제학교. 수능시험을 마친 전국의 고등학교에서는 각 대학별로 치러지는 논술 준비에 여념이 없지만, 이곳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관심사는 프랑스 대입 논술시험인 바칼로레아이다. 지난 11월 20일 찾아간 하비에르 국제학교는 수업을 끝낸 10대 청소년들이 쏟아내는 프랑스어, 영어가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러나 분홍색 개량한복 차림의 엘렌 르브렝(69) 교장은 능숙한 한국어로 손님을 맞았다.

“한국 학생들은 모두 재미있고, 사고력이 대단해요. 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부터 이 학생들의 잠재력을 어떻게 살릴 수 있을지 고민했어요. 하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수학능력평가시험 준비에 몰입해야 하는 한국의 교육시스템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더군요. 그런 점에서 프랑스식 교육제도는 학생들의 사고력과 논리력을 최대한으로 살려줄 수 있는 제도입니다.”

하비에르 국제학교는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프랑스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을 학생들에 가르치고 있는 교육기관이다.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도 프랑스학교가 있지만 프랑스 국적이 있는 학생들만 입학할 수 있는 곳이다. 대학 입학시험 역시 한국의 수학능력 평가시험이 아닌 프랑스 입학시험 바칼로레아에 대비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기러기 부모’ 보며 학교설립 결심

하비에르 국제학교의 르브렝 교장은 1980년 대구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학)로부터 불어불문학과 교수로 초청을 받아 한국을 처음 찾았다. 프랑스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고전문학을 전공한 그녀는 교육자인 동시에 프랑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도회 소속의 수녀다. 하비에르 수도원은 교육과 종교의 융합을 추구하는 곳이기 때문에 교육을 통해 수도생활을 구현하는 기관이다. 불교의 ‘학승(學僧)’과 비슷하다. 교육기관에 몸담고 있지만 항상 수도원에서 무소유(無所有)의 수도사 생활을 하고 있다.

한국을 찾을 당시 그녀는 프랑스의 교수자격증인 아그레가시옹(agregation) 자격증을 획득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내에서 유일한 정식 불어불문과 교수였다고 한다. 효성여대와 고려대학교를 거쳐 1985년부터 서강대학교에서 불어불문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2001년 정년퇴임했다. 지금이야 한국 생활 25년 동안 옷이며, 말이며 행동거지도 한국 사람이 다 됐지만 처음 한국행을 결심했을 때는 한국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몰랐다.

“수도회로부터 한국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고 방으로 올라가 처음으로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 지도에서 찾아 봤어요. 하지만 25년 동안 한국생활을 끝내고 나니 막상 한국을 떠나기 힘들어지더군요. 제가 만난 한국 학생들의 열정이 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한국의 교육문제를 고민하던 르브렝 교장은 대학에서 정년 퇴임하기 5년 전부터 새로운 교육시스템을 도입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한국의 교육시스템으로는 도저히 학생들의 잠재력을 깨울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대학교에 갓 입학한 신입생들은 입학과 동시에 중·고등학교 때 밤새워 공부한 것을 잊어버린다”면서 “중·고등학교 때 배운 것이 완전히 딴 세계에서나 필요한 지식들이라고 판단하는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또 한국 부모들이 자녀 교육을 위해 외국으로 유학을 보내고 ‘기러기 아빠’ ‘기러기 엄마’가 등장하게 된 것도 그녀가 프랑스식 교육제도를 도입하게 된 계기가 됐다.

▲ 하비에르 국제학교에서 중학생들이 수학 수업을 받고 있다.

내년 첫 졸업생 배출

2002년 3월 탄생한 하비에르 국제학교에서는 혜화동의 대형 주택을 개조해 문을 열었다. 모든 과목을 프랑스어로 진행하고, 중학교 때부터 제1외국어로 영어를 필수적으로 이수하고 있다. 또 중학교 3학년이 되면 중국어나 스페인어를 이수해야 한다. 학제도 중학교 4학년, 고등학교 3학년으로 프랑스와 똑같은 교육시스템이다. 그러나 한국에 터를 잡고 있는 만큼 다른 국제학교와는 달리 국어(한국어)와 한국사도 중요한 과목으로 배정해 놓았다.

학부모들 사이에서 바칼로레아를 준비하는 교육기관이 있다는 소식이 알려져 처음 12명에서 시작했던 학생수도 불과 2년 만에 80여명으로 늘었다. 지금은 주택을 개조한 상태에서 교육시설이 열악한 상황이지만 프랑스 수도원 본부와 기부자들의 도움을 얻어 구기동에 학교 부지를 따로 마련하고 기숙사와 강의동을 건축 중이다. 내년 5월쯤이면 학교를 옮길 예정이다.

현재 교사수는 20여명. 대부분 프랑스인 출신이고 국어와 국사는 한국인이 가르친다. 그러나 국제학교이기 때문에 모든 한국인이 입학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국제학교로 등록한 이상 해외 장기체류했던 학생, 외국인의 자녀들에 한해 입학자격이 있다.

한국 교육에 대한 치열한 고민 끝에 탄생한 학교인 만큼 철저하게 학생들 위주의 교육을 고수하고 있다. 르브렝 교장은 “학생들에게 ‘왜(Why)’라는 질문을 던지면 ‘그냥 그렇다’는 대답이 가장 많다”면서 “중·고등학교 교육을 통해 자기주장이나 자기논리를 주장하기보다 사회와 주변사람이 답이라고 정해준 것만 외웠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하지만 논술 위주의 바칼로레아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답을 외워서는 도저히 안된다. 수학도 답이 틀리더라도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이 훌륭하다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바칼로레아의 특성이다. 특히 철학을 필수과목으로 선정하고 있는 바칼로레아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고등학교 때부터 심오한 철학자들을 만나게 된다. 르브렝 교장이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과목도 철학이다.

내년이면 하비에르 국제학교에서 첫 졸업생 4명을 배출할 예정이다. 이 학생들은 고등학교 2학년 여름에 치르는 바칼로레아 1차 시험(프랑스문학 시험)에서는 상당히 좋은 성격을 거두었다고 한다. 르브렝 교장은 “내년 6월에 전공시험을 치르게 되는데 첫 졸업생들이 좋은 성적을 올려야 학교 체면도 서고 우리 교육방식이 옳다는 확신도 들 것 같다”며 근심어린 기대를 표시했다. 한국의 수능시험이든, 프랑스의 바칼로레아든 일단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전세계 모든 학생들의 운명인 것이다.

이석우 주간조선 기자(yep249@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