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문화 2004.01.15. 1787호
내 인생의 ‘쓴 시절’성악가 조수미
화려함에 감춰진 첫사랑의 몸서리

그녀를 만났을 때 느낀 첫인상은 당당함과 왜소함이었다. 2003년 12월 26일 오후 1시 인천 주안장로교회 부평성전의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린 조우했다. 청바지 차림의 그녀는 말투, 행동거지, 표정, 말의 내용에서 자신감과 열정이 넘쳐흘렀다. “에너지 하면 저 아녜요.”

그러나 세계적 성악가라면 엄청난 성량에 걸맞은 큰 체격의 소유자가 아니겠느냐 생각했지만 그녀는 한국 여성 평균 키보다 작은 158㎝에 불과했다. 저런 체격에서 그 누구도 따라오기 힘든 고음과 카리스마가 나온다니…. 역설적으로 그녀의 정신적 에너지의 깊이를 암시하는 것 같았다.

세계적 소프라노 조수미(曺秀美·41)씨의 인생을 돌아보면 행운(lucky)과 행복함(happy)의 연속같이 느껴진다. 괜찮은 가정, 열성적인 어머니, 학교 선생님들의 기대와 교육(아인슈타인이나 에디슨, 처칠처럼 선생님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거나 스스로 학교 교육에 진저리를 쳤던 인물들과 비교해보면 특히), 성공적 유학 생활, 국제 콩쿠르마다 우승하는 상복(賞福), 천재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의 만남 등등이 그렇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부인한다.

“그렇지 않아도 이런 인터뷰를 하고 싶었어요. 남들은 제가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여유있게 유학하고, 한마디로 잘 풀린, 부티나게 살아가는 예술가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100%가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남자 없어”

어려서부터 하루 7시간 이상씩 피아노를 친 스파르타식 교육, 아버지 사업은 늘 기복이 심해 불안정했고, 극심하게 힘들었던 유학 시절, 세계 무대에서 코리안에게 쏟아지는 무시, 냉대와 싸우며 활동했던 이야기들을 속사포처럼 뿜어내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래 힘들었을 거야”라고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진정 참기 어려운 불행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할 때이다. 사후에 불멸의 화가로 추앙받는 고흐는 생전에 빵을 살 돈조차 없어 자살하고 말았다. 반면 조수미는 노력한대로 대가를 받는 행운아였다.

이런 전제하에서 그녀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일까를 찾아보았다. 그래서 발견한 그 인생에서의 약점(weak point)은 ‘고독’이었다.

그녀는 얼마전 인터뷰에서 “결혼하고 싶지만 아직까지 상대를 만나지 못했다. 무대 조명 아래 화려한 ‘디바(diva·프리마돈나)’로만 바라보는지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남자가 없다”고 솔직히 토로했다. 어머니 김말순씨는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몇 년 전 언론에 소개된 외국인 매니저도 괜찮은 사람 같은데 수미가 ‘이성으로선 아니다’고 거절했고, 유명한 공학박사와도 잠시 사귀었는데 수미가 전세계를 돌아다니느라 너무 바빠 성사되지 못했다”고 했다.

카라얀이 ‘신이 내린 목소리’라 극찬했던 조수미. 그러나 대학 시절 1년 간의 첫사랑에 지금도 연연하는 ‘소녀’다. 그녀의 자서전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를 보면 첫머리에서부터 무려 15쪽이나 첫사랑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지금도 첫사랑을 못잊고 계신 것 같은데 그토록 강렬했습니까.

“이후로는 그런 사랑을 해보지 못했어요. 제가 아직도 결혼 못하고 한국인 신랑을 찾는 이유도 그 첫사랑의 환상, 열정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녀의 목소리 톤이 올라가고 얼굴은 생기가 돈다. 그녀의 생각은 21년 전 1982년 3월로 돌아간다.

도서관에서 동갑내기에게 구애

대학 2년생 조수경(조수미의 본명)은 우연히 식당에서 동갑내기 K씨(경영대 2년)를 보게 된다.

“깨끗한 피부에 바람 머리 스타일, 약간 거만한 자세로 담배를 피는 모습이 바로 ‘제 타입’이었죠.”

조수경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후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K씨를 직접 만났다. 단도직입적으로 사귀자고 하니 그 남자는 “사귀는 여자가 있다”고 했다. “1주일 뒤까지 예스냐 노냐를 밝히라”고 통첩한 뒤 자리를 떴다. 결국 예스. 이후 불 같은 사랑은 이어졌다.

“다방, 영화관, 디스코클럽, 여행, 하루 24시간, 1년을 그렇게 붙어다녔죠.”

그러면 사실상 동거하다시피 했다는 얘기인데.

“상상에 맡기겠어요. 그때 저는 그 사람과 결혼할 생각이었어요. 아이들 이름도 미리 지었고, 그가 원한다면 성악가의 길도 포기하고 그의 아내로서 살고 싶었어요.”

당연히 집과 학교에선 난리가 났다. 그토록 음악에 충실하던 사람이 수업은 물론 시험까지 빠지니 성적은 4과목에서 F학점(낙제점)이 나왔고 1등에서 꼴찌(54등)로 추락했다. 조수미의 자질을 아끼던 이경숙 선생님은 호통을 쳤고 그래도 안되니까 결국 부모와 상의해 부랴부랴 유학을 보내게 했다. “이러다간 완전히 망가집니다.”

부모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를 회고하는 어머니 김말순씨는 “그 남자친구가 집안도 좋고 인물도 좋고 나무랄 데가 없었는데 문제는 수미가 음악을 놓았다는 거예요.”

부모가 반강제적으로 유학 보내

당시 사업도 안좋았던 아버지는 간신히 출국 이틀 전 3000달러를 만들어 조수미를 반강제적으로 이탈리아에 보냈다. 1983년 3월 28일 밤 로마공항. 가방 두 개를 들고 도착한 조수미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초 나오기로 한 사람은 안 나왔고 밖에는 비가 내리고….

“그러나 전혀 두렵지 않았어요. 도리어 드디어 독립하는구나 하는 데서 오는 자유에 대한 갈망과 미래의 희망이 넘치더라고요.”

이후 고된 유학생활이 시작된다. 82세된 이탈리아 할머니집에서 당시 10만리라(5만원)의 월세를 내고 생전 처음 청소, 밥, 설거지 등을 하며 마치 가정부처럼 지내며 공부를 시작한다. 공항에서 부모님 눈을 피해 먼 발치에서 작별인사를 나누어야 했던 남자친구 K씨는 4개월 뒤 이별의 편지를 보내왔다. 물론 조수미의 마음은 쓰라렸지만 이미 ‘내 길은 여기다’라며 음악도로서의 길을 굳히고 있던 터였다.

이후 승승장구의 길을 걷는다. 1985·1986년 참가한 국제 콩쿠르 대회마다 1등을 휩쓸며 유럽 명문극장들에서 프리마돈나로서의 공연이 성공을 거둔다. 그 유명한 카라얀을 만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덕분에 탄탄대로를 걷는다. 세계적 지휘자 주빈 메타는 “금세기 최고의 리릭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라고 평가했다.

그의 노래를 들으면 참으로 서정적(lyric)이고 애절하다. 아마 그것은 그가 못잊는 미완(未完)의 첫사랑의 달콤함과 갈망이 절절히 배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충족되지 못한 부분이 사랑(love)인 것 같다. 역으로 만약 그의 첫사랑이 충족된 상태로 끝났다면 이런 애절한 노래가 나올까 생각해본다. 조씨도 “그 첫사랑이 저에게 음악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으며, 제 노래도 리릭이 됐다”고 말했다.

절망과 좌절이 희망과 도전으로 반전

이제 우리는 조수미의 인생의 행로를 돌아보면서 세 가지 가정을 해볼 수 있다.

첫째, 만약 그때 그 사람과 그런 불 같은 사랑이 없었다면 이후 그녀는 어떤 행로를 걸었을까. 아마 꼴찌를 기록하며 망가지지도 않았을 것이요, 그렇다면 없는 살림에 그런 식의 ‘허겁지겁’ 유학을 빨리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순탄한 길을 걸으며 국내에서 꽤 괜찮은 성악가로 남았을 수 있다. 설령 유학을 갔어도 훨씬 안정된 상황에서 평범하게 지내지 않았을까.

둘째, 그 불 같은 사랑에 안주했다면, 그래서 한 사람의 아내로 만족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오늘날의 조수미는 없을 것이다.

셋째, 유학을 간 뒤 사랑의 좌절로 실의에 빠졌거나 고된 외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면 어떠했을까. 아마 그저 그런 성악가로 지냈을 것이다. 청운의 뜻을 품고 이탈리아 성악 유학을 갔다가 소리없이 돌아온 사람들은 너무나 많다.

어쩌면 조수미의 인생은 그 절망과 좌절이 오히려 희망과 도전으로 반전되며, 그 실연(失戀)의 아픔이 결국 미래의 성취로 치환되는 극치를 보여준다. 불 같은 사랑이 있었기에 그는 망가졌고, 망가졌기에 주위 사람들이 그를 서둘러 더 큰 음악세계로 보냈고, 이별과 고독의 아픔 속에서 그는 성숙해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커튼이 내려진 뒤 조수미는 외롭다. 큰 성취와 명성이 있지만 1년에 330일 집을 떠나 전세계에서 공연을 한다. 개인 시간은 거의 없고 2~3년 뒤 공연 스케줄까지 다 짜여 있다.

“호텔에서 일어나면 여기가 어디인가부터 생각해요. 낯선 방에서 눈을 뜨는 순간의 외로움은 때로 울음이 날 만큼 절절해요. 또 공연을 마치고 호텔방에서 혼자 화장을 지우면 참기 어려운 허무감이 몰려와요. 너무 외로워 가족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통화가 안되면 절망적이죠.”

애견 재키와 함께 여행

그녀와 고독을 함께 하는 친구는 애견 재키였다. 처음으로 1주일의 짬이 나 스위스로 여행을 떠났을 때 재키가 동행했다. 그녀가 음악에 더욱 매진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인간적 고독과 삶의 허무를 이겨내려는 것이다. 기라성 같은 유명 성악가들이 무대 뒤 그늘에서, 세월과 고독에 패배해 불행한 삶을 마치곤 했다. 그러나 조수미는 이것을 극복하려고 한다.

그는 평소 “인공수정을 해서라도 아이를 갖고 싶다”고 했다. 2001년 자궁근종이 발견돼 미국에서 수술을 받기도 했다.

지금도 아이 갖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신가요.

“얼마전 디트로이트 병원서 최종 답장이 왔어요. 인공수정도 어려우니 제 아이 갖는 것은 100% 포기하라는 거예요.”

그녀의 표정에서는 쓸쓸함과 체념, 비애 등이 느껴졌다.

“무대 떠나면 작은 것에 행복을 느끼는 보통여자인데요, 여자로서 결혼도 못하고 아이도 못갖는 건 슬픈 일이죠.”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우리나라 아이들을 위한 사업을 하고 싶어요. 행복하고 자유스럽고 정서적으로 올바르게 살도록 도와주고 싶어요.”


⊙ 1962년 서울 출생|1981년 선화예고 졸. 서울대 음대 수석 입학(성악과)|1983년 이탈리아 로마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입학|1985년 이탈리아 나폴리 Zonta·시실리 ENNA·트리스테 VIOTTI·Vercelli Viotti 국제콩쿠르 등서 1등|1986년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졸업. 이탈리아 트리스테 베르디 극장서 오페라 ‘리골레토’중 질다 역으로 데뷔. 스페인 바르셀로나 VINAS·남아공 Pretoria·이탈리아 베로나국제콩쿠르 등서 1등|1987년 프랑스 파리오페라극장 공연|1989년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서 ‘리골레토’ 중 질다 역|1991년 영국 런던코벤트가든극장서 ‘호프만의 이야기’중 올림피아 역|1993년 이탈리아 황금기러기상 수상. 오페라 ‘그림자 없는 여인’으로 미국 오페라 부문 최고 음반 선정|1995년 광복 50돌 기념 세계를 빛낸 한국 음악인 대향연(잠실올림픽 주경기장)|1997년 프랑스 비평가 선정 성악 부문상|1996년 일본 각지서 독창회. 뉴욕 카네기홀 데뷔|1998년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축하공연|2001년 ‘톱 오페라틱 스타’ 독창회(뉴욕 카네기홀)|2003년 유네스코 선정 ‘한국을 대표하는 평화예술인’|대표음반=피터와 늑대, 베스트 오브 조수미, 디어 아마데우스, 온리 러브 등

 

⊙ 인터뷰 / 조수미의 첫사랑 K씨

“수미는 엄청나게 몰입하는 사람 그것이 성악가 조수미 만든 힘”

그는 미 컨설팅 서울회사의 파트너로 근무하고 있었다. 1987년 결혼한 뒤 미국 유학을 떠나 MBA(경영학 석사)를 받았고 1996년 귀국했다. 그는 기자와 통화에서 “과거 언론사로부터 수경(조수미씨의 본명)이와 관련된 전화를 두 번 받았다”고 밝혔다.

“몇 년 전 ‘TV는 사랑을 싣고’란 프로에서 출연 제의를 해와 거절했죠. 그렇게 공개적으로 만나고 싶진 않았죠. ”

학생 때 조씨에게 끌린 이유는.

“튀는 스타일이었죠. 옷차림, 행동, 당돌함 등에서…. 1년 간 우린 눈이 멀어 공부는 안하고 디스코장이다, 용인자연농원이다 함께 다녔죠.”

그런데 왜 헤어졌죠.

“수경이가 유학가 떨어져 있게 되니까 감정도 식기 시작했고, 저도 정신차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현실적으로도 그는 그쪽 세계로 떠난 사람이고. 더 이상은 불가능하겠다는 생각에서 편지를 썼죠. 21살 때 사랑이 그렇지 않겠어요.”

조씨의 장단점은.

“한마디로 ‘몰입을 한다’는 게 장점이자 단점입니다. 그때는 1년 간 다른 것 다 버리고 사랑만 했어요. 그런 점이 지금의 조수미를 만든 원동력이라고 봐요. 물론 그때 짧게는 망가졌지만 길게 보면 그래서 유학도 갔고 더 열심히 음악에 몰입한 것 아닐까요. 무섭게 포커스(focus·집중)하는 사람이에요.”

조씨의 성공을 언제 알았나.

“유학 중이던 1990년대 초 서울 친구들로부터 전화를 받고서요.”

헤어진 후 조씨와는 만나거나 연락이 있었나.

“딱 한 번 전화연락이 왔어요. 앞서 말한 TV프로 출연요청을 거절한 직후에.”

조씨는 귀하를 아직 잊지 못하는 것 같은데.

“(웃으면서) 다시 보면 실망하겠죠. 그 사람이나 저나 다 그때의 저희들이 아니잖습니까. 앞으로도 더욱 좋게 되길 빕니다.”

만난 사람= 함영준 조선일보 국제부장 (yjhahm@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