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사회 2003.07.03. 1760호
역사 / ‘김일성 수수께끼’의 주인공 김경천
일본 육사 출신으로 만주 망명,
시베리아서 ‘백마 탄 항일 영웅’으로 칭송
연해주 마적 소탕…
소련서 간첩죄로 체포돼 1942년 심장질환으로 숨져

(전문게재)

▲ 김경천 장군의 생전 모습.
김경천(金擎天)의 본명은 김광서(金光瑞)이다. 일본 육사 출신인 그는 1920년대에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한 대표적 항일 명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런 그를 당시 언론들은 ‘김 장군’으로 칭송하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1920년대 중반 이후 김 장군은 종적을 감춘다. 세상 사람들은 이후 항일투쟁의 전설적 영웅으로 김 장군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국경지대에서 전개되는 국내 진공작전은 김 장군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인양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결국 이러한 인식은 해방 이후 김일성 장군론과 연결되게 된다. 김경천 장군이 진짜 항일영웅 김일성이란 것이다.

이후 1990년 한ㆍ러 수교 이후  김경천 장군에 대한 많은 사료들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는 딸과 모스크바 근교에 살고 있는 아들이 한국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김경천은 김일성과 별개의 인물이란 점이 확연히 밝혀지게 되었다.
한국서 오랫동안 김일성 장군으로 알려졌던 김경천 장군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2·8 독립선언으로 만주 망명 결심

김경천 장군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일본군 중위로 3·1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큰 화제가 되었던 인물이다. 만주로 망명한 이후에는 서간도 지역에 위치한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서 지청천(池靑天), 신동천(申東天) 등과 함께 남만주 3천(天)으로 만주지역 항일독립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창해청년단, 수청고려의병대, 고려혁명군 등에서 활동하며 러시아 지역 항일투쟁을 선도하였다. 일본 육사 기병과 출신인 그는 시베리아에서 투쟁시에도 백마를 타고 기병부대를 주로 지휘, 백마를 타고 대륙을 누빈 전설적 항일 영웅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학계에서는 김경천에 대하여 구체적인 실상을 밝히지 못해 그는 항일 영웅이면서도 수수께끼의 인물로 인식되어 왔다.

김경천의 본관은 김해이며, 함남 북청군 신창읍 승평리에서 1888년 6월 5일에 출생하였다. 본적은 서울 사직동 166번지이며, 어릴 때 이름은 현충이다. 1909년 12월 유일한 한국인 관비(官費) 유학생으로 일본 육사 제23기생으로 입학, 1911년에 졸업하였다.

육사 재학시절 군사교육뿐 아니라 중국어·러시아어 등 어학도 공부하였다. 이러한 교육은 김경천이 일본의 전략, 전술, 일본인의 심리상태 등을 이용하여 보다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 '애마'와 함께한 김경천 장군.
1911년 5월 육사를 졸업한 김경천은 동경 제1사단 기병 제1연대에서 근무하였다. 그 때문에 육사 26·27기 후배들과 자주 접촉하였다. 1916년 12월 제 26ㆍ27기생 가운데 홍사익, 이응준 등 동경 제1사단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장교들이 발기인이 되어 친목단체인 전의회를 만들었을 때 그는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3·1운동이 일어난 직후까지 회지(會誌)를 발간하여 동창상호간의 친목을 돈독히 하는 한편, 회원 소식을 알려주기도 하였다.

김경천에게 결정적인 심적 변화를 준 것은 동경에서 있었던 2·8독립선언이었다. 그는 그 영향으로 병을 칭하고 휴가를 얻어 서울에 도착, 망명의 기회를 엿보았다. 그리하여 1919년 6월 6일 지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망명 후 김경천은 일단 신의주 맞은편 안동현(현재 단둥시)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대한독립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대한독립청년단 단원들과 함께 1919년 8월에는 안병찬 외 28명이 연명해 ‘중화민국 관상보(官商報) 학계 제군에게 고함’이란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에서 한ㆍ중연합을 강조하는 한편 민족의 요구가 국제연맹회의에서 원만한 해결을 얻지 못하면 혈전을 도모할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한ㆍ중 공수동맹을 강조하였다.

지청천·신동천과 함께 “남만주 3天”

김경천의 대한독립청년단 활동도 같은해 8월 총재인 안병찬의 체포로 인하여 세력이 약화되자 크게 위축되었다. 이에 보다 효율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서간도 유하현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 교관으로서 활동하였다. 이것은 독립운동계에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이곳 무관학교에서 김경천은 이청천과 함께 독립군을 양성하며 시기를 엿보았다.

이 학교에는 구 한국군관학교 출신인 신팔균(申八均)도 있었다. 이 세 사람은 조국을 위해 투쟁할 것을 맹세하고 그 맹세의 뜻으로 다같이 천자(天字)가 붙은 별호를 가지게 되었다. 동천 신팔균, 경천 김광서, 청천 지석규(池錫奎)라고 했으며, 이들을 남만주 3천이라고 하였다. 그때 장길상이 배천택을 시켜 5만원이란 거금을 군자금으로 보내왔는데 이 돈을 그들 3인이 공동관리를 하면서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들은 1920년 3월 1일을 기하여 국경지대인 자성, 후창, 혜산진 등 어느 한 곳을 점령해서 국내에 3·1운동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정신적 자극을 주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신동천은 남만주 한인사회의 지원을 얻기 위해, 지청천은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하기 위해 그리고 김경천은 러시아 연해주로 무기 구입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각각 이동하였다.  

한편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하던 김경천은 우선 중간 기착지로 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북간도를 택하였다. 단신으로 북간도로 간 그는 그곳에서 동지들을 규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방파벌간의 갈등으로 그곳에 정착하지 못한 김경천은 러시아 연해주 지역으로 재차 이동하였다. 

시베리아 일대서 ‘김 장군’으로 칭송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그는 그곳에서 독립운동의 기회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토크도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인한 일본군의 감시와 조선인 체포로 인하여 활동이 어려웠다. 이에 김경천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산림지대인 수청(현재 파르티잔스크) 지역으로 이동하여 산림 속에 일단 피신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에는 수청 지역 창해청년단의 총사령관으로 활동하면서 수청 지역의 마적 소탕에 전력을 기울였다. 결국 김경천은 1920년 수청 지역에서의 마적 퇴치 활동 및 항일운동으로 시베리아 지역에서 그 명성을 크게 얻었고, ‘김 장군(金將軍)’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1921년 봄 연해주 수청군 인접지역인 올가군에서 300여명에 달하는 통합빨치산 부대가 조직되자 김경천이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수청의 아누치노(도비허) 구역에 있는 러시아 백군 카벨부대와 전투를 벌였다. 또한 카르투크 마을의 치열한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수청 다우지미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경천은 1921년 초 수청고려의병대에 초빙되어 군대의 총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22년 러시아와 중국 국경지방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 단체들은 각 단의 통일을 도모하는 동시에 장정 모집과 무기 구입에 힘써 같은해 10월 고려혁명군을 조직하였다. 고려혁명군 총재는 이중집(李仲執)이며 소재지는 추풍이었다. 김경천은 동부사령관을 담당, 본부를 그의 근거지인 수청에 두었다.

그러나 러시아 내전이 볼셰비키의 승리로 끝나면서 김경천의 항일운동도 종막을 고하게 되었다. 1922년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자 같은해 12월 말, 러시아측은 지금까지의 동맹군인 한인독립군에 대해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 후 김경천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한 ‘중앙아시아로의 한인 강제이주’를 앞두고 간첩죄로 체포되어 결국 1942년 1월 2일 소련의 북쪽 끝 코미자치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 아르항겔스크에서 심장질환으로 사망하였다. 스탈린이 사망한 후인 1959년 2월 16일 김경천은 모스크바 군관구 군법회의에서 사후(死後) 복권되었다.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hwpark@suwon.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