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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 최고령 독립유공자 구익균 옹의 ‘103년 나의 삶’
“내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시절? 광복 직후 상하이서 교민 2000명 고국행 도왔을 때”
▲ photo 정복남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한·일 강제병합 100주년. 제국주의 열강 앞에 풍전등화의 운명이었던 대한제국 시절에 태어난 사람은 이제 모두 100살이 넘어버렸다.

생존해 있는 최고령 애국지사 구익균(具益均) 옹. 1908년 2월 18일(음력) 평북 용천 출생이니 올해 103세. 구익균 옹은 지난 3월 14일, 103세 생일을 맞았다.

구 옹은 최고령 애국지사로 여러 번 근황이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다. 103세의 취재원을 만난 일이 없는 기자는 은근히 겁이 났다. 장수가 재앙이 되는 경우를 종종 봐왔기 때문이다. 구익균 옹은 현재 서울 낙원동의 50㎡(15평) 되는 아파트에 방 한 칸을 세내어 살고 있다.

방의 미닫이문을 열었을 때 벽에 걸려 있는 한 인물의 초상화가 강렬한 눈빛을 뿜어냈다. 도산 안창호! 젊은 날 중국 상하이에서 도산의 비서로 3년을 일했고 이후 도산의 정신을 따라 살아온 애국지사의 삶이 그대로 묻어났다.

좁은 방안에는 생신 축하난이 두 개 놓여 있었다. 하나는 김양 국가보훈처장이 보낸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족이 보낸 축하난이었다. 또 무궁화 잎사귀를 형상화한 종이공예 작품 3점이 걸려있었다. 혼자된 독립유공자 부인들이 구 옹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구 옹의 피부는 놀랍게도 건강한 60대 남자의 혈색보다도 좋았다. 악수하는 손에서 악력(握力)이 전해져왔다. 거동이 조금 불편하고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것만 빼놓고는 구 옹은 놀라울 정도로 건강했다. 발음도 정확했고 기억력도 크게 문제가 없는 듯 보였다. 향어(鄕語)인 평안도 억양이 신선하게 들렸다.

명함을 건네자 그는 “나는 명함이 없는데”라면서 복사한 독립유공자증을 책상 위에 내놓았다. 독립유공자증 뒷면에는 ‘도산 안창호 혁명사상연구원 이사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침대 옆 책상 서랍에서 문건을 꺼내 기자에게 건넸다. ‘항산 구익균 애국지사의 경력’이라는 제목이 붙은 A4용지 3장짜리로 정리한 자신의 생애와 신문 기사 하나를 주었다. 그는 또 자신의 회고록 ‘구익균 회고록-새역사의 여명에 서서’(일월서각)를 보여주었다.

이제까지 만나서 인터뷰한 최고령 취재원은 2007년 당시 98세이던 김판술 전 의원(1909~2009)이었다. 대한제국 시절 태어나 100년을 넘게 살아온 사람은 이제 몇 명 남지 않았다. 구 옹의 삶 자체가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박물관이다.

구 옹은 국가보훈처에서 연금으로 매월 220만원을 받는다. 50만원은 집 월세로 나가고 100만원은 도우미 인건비로 쓰고, 70만원으로 생활비 및 용돈을 쓴다. 기자는 4월 5일과 6일 구 옹을 두 차례 인터뷰했다. 긴 역사를 살아온 사람과의 인터뷰에서는 가장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부터 먼저 털어놓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3·1 독립운동 때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났을 때 열 살 된 글방 아동이었어요. 나는 어른들을 따라 이 산 저 산으로 다니면서 만세를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상하이 망명의 계기가 된 신의주고보 학생 시위 사건은 어떤 겁니까.

“신의주고보 4학년 시절 ‘신우(信友)’ 편집장을 맡아 활동했어. ‘신우’지를 통해, 또 학생회를 조직하여 조선총독부의 교육을 노예교육으로 규정하고 반대하는 운동에 앞장서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어.”

신의주고보를 졸업한 후 그는 경성제국대학에 지원, 입학시험을 치렀으나 낙방하고 만다. 추천서에 ‘병(丙)’을 받은 게 결정적이었다. 구익균은 상하이냐 도쿄냐를 놓고 고민하다 상하이를 선택했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다롄을 거쳐 상하이로 들어갔다. 당시 상하이에는 교민 500여명이 살고 있었다. 상하이에 도착했을 때 신의주고보 학생 시위 사건이 알려져 그는 영웅 대접을 받았다.

100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기는 언제였습니까.

“(2차대전) 종전 직전 상하이에서 무역을 해서 큰돈을 벌었어. 돈이 있었으니까 8월 15일 상하이에서 미국 비행기 타고 충칭에 가서 김구 주석을 만날 수 있었지. 그때 김구 주석이 그래.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냐’고. 상하이에서 충칭이 멀거든. 그때 김구 주석이 내게 자신의 입국 준비 일체를 맡겼어.”

구익균은 광복 직후 임시정부에 의해 상하이 교민단장에 임명된다. 당시 상하이에는 국권을 회복한 조국으로 돌아가려는 교민 3000여명이 중국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상하이를 중심으로 교민단을 만들고 학교(인성학교)를 재건했어. 또 일본 학병에 나간 사람들과 학병에서 탈출한 사람들을 만났지. 한국으로 돌아가려는 동포들은 대부분 돈이 없는 사람들이었어. 그래서 시간이 1년 이상 걸렸어. 나는 교민단장으로 국내로 들어가려는 동포들을 돕고 배를 오게 만들고 그런 일을 했어. 2000여명의 한국행을 도왔지. 그때가 제일 화려했던 시간이었어요.”

구 옹은 이렇게 말하곤 입가에 웃음이 환하게 피어올랐다. 꼭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그때 가난한 교민들이 어떻게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까.

“아편 장사해서 돈 번 사람이 많았지만 교민들을 위해 돈 한푼 안 내놓데요. 그 사람들은 이런 때 아니면 다시 돈벌 기회가 없다며 악착같이 벌었지요. 하지만 나는 그때 내 돈을 빛나게 썼어. 한 60만달러쯤 썼어.”

구익균이 상하이에 머문 기간은 1929년부터 1947년까지 약 18년. 식민지 청년은 상하이가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유린되고 수많은 이념의 각축장이 되는 것을 모두 현장에서 지켜보았다.

1930년대 상하이 분위기를 설명해주십시오.

“국공(국민당·공산당)합작 분위기가 오랜 기간 유지되었는데, 장제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을 몰아냈어요. 이후 반(反)공산당 분위기가 퍼졌어요. 그때 교민들은 장제스가 통치를 잘해야만 한국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기대했습니다. 임시정부는 장제스를 도와야 했고, 결국 임시정부도 반공산당 흐름으로 가게 되었죠.”

당시 독립운동 하던 사람들 중에는 공산주의에 빠진 사람이 많았죠.

“많았지.”

선생께서 사회주의사상에 기울게 된 계기는 언제였습니까.

“3·1운동을 계기로 마을의 어른들을 따라 독립운동에 참가하게 되었지. 나는 조선 500년 동안 평안도 사람이 받은 사회적 차별에 반항하는 데서 근대적 민주주의 사상에 눈을 뜨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일제에 반항하는 사상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게 되었지요. 신의주고보 시절 천도교를 접하면서 생각이 더 발전했지. 이후 상하이에서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서 나는 중간파의 길을 걸어왔어.”

당시 상하이에 있던 안중근 의사의 아들 안준생이 일본군의 꼬임에 빠져 불미스러운 행동을 했는데요.

“그때 김구 주석이 충칭에서 안준생에게 ‘상하이는 일본군 수중에 떨어지니까 위험하니 충칭으로 오라’면서 자동차를 보냈던 일이 있지요. 하지만 안준생은 상하이에 남았다가 그런 일을 당했지요.”

구 옹은 한 세기를 살면서 세 번 결혼을 했다. 14살 때 당시의 관습에 따라 조혼(早婚)을 했다. 하지만 신의주학생운동 사건에 연루돼 상하이로 망명을 가면서 결혼 생활은 어긋나기 시작했다. 상하이 시절 그는 두 번째 결혼을 했지만 부인이 일본 경찰에 인질로 잡히면서 정신병에 걸려 일찍 죽고 만다. 1947년 한국으로 돌아와 노수경과 만나 세 번째 결혼했고 두 딸을 낳았다. 두 딸(옥란·혜란)은 현재 미국에 살고 있다. 세 번째 부인은 1979년에 작고했다. 구 옹은 “노수경을 내가 가장 사랑했어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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