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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24)]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정복
타슈켄트 거점 삼아 南으로 20년 만에 중앙아시아 정복 완성
시베리아 동진의 눈부신 성공에 비해 중앙아시아 남진은 좌절의 연속
1860년대 타슈켄트 점령해 방위선 구축… 부하라 등 차례로 점령
북방과 남방 세력 각축·실크로드 통한 동서 교류 역사는 막 내려
유라시아 내륙 러·청에 의해 분할… 2000년 역사의 물줄기 바꿔
▲ ‘전쟁터에서’. 1873년 베레샤긴(V. Vereshchagin) 작. (모스크바 트레자코프 미술관 소장.)
1853년 7월 28일 러시아군은 4일간의 치열한 공격 끝에 시르다리아 강 중류에 위치한 조그만 성채 악크 메체트(Aq Mechet)를 점령했다. 원래 현지어로 ‘백색의 사원(寺院)’이라는 뜻을 지닌 이 성채(城砦)는 점령군 사령관의 이름을 따서 페트로프스크(Petrovsk)로 바뀌었고, 소비에트 시기에는 키질 오르다(Qizil Orda·현재 카자흐공화국령), 즉 ‘붉은 군영(軍營)’으로 다시 바뀌었다. 중앙아시아의 도시들처럼 정치적 격변에 따라 그 명칭이 수난을 받은 곳이 지구상에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러시아는 악크 메체트를 점령함으로써 카자흐스탄 초원 가장 남쪽에 거점을 확보한 셈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의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중앙아시아를 향한 러시아의 전략적 위치는 여전히 불안정하고 미완성인 상태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즉 서북쪽에서부터 시작하여 카자흐스탄의 광막한 초원을 가로질러서 시르다리아에 안착한 시르다리아 라인(Syr Darya Line)과 동북쪽의 시베리아에서 시작하여 천산(天山) 북방의 알마티(Almaty·당시 이름은 Verny)에서 끝난 시베리아 라인(Siberia Line)이 서로 만나지 못한 상태로, 남쪽의 방어 라인은 그대로 취약하게 열린 채 남아 있었던 것이다.

19세기 중반 시르다리아 이남의 투르키스탄은 세 개의 ‘칸국’, 즉 칸(khan)이 지배하는 나라로 나뉘어 있었다. 가장 북쪽에 호칸드(Khoqand) 칸국, 남쪽에 부하라(Bukhara) 칸국, 그리고 서남쪽 아래에 위치한 히바(Khiva) 칸국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에서 특히 호칸드와 부하라는 러시아 변경지역을 약탈하거나 혹은 러시아제국에 ‘복속’되어 있던 카자흐 부족민들을 부추겼기 때문에 러시아와는 적대적 관계에 있었고, 이러한 상황은 러시아의 중앙아시아에 대한 전략적 입장에 심각한 문제를 노출하고 있었다. 호칸드의 변경도시인 악크 메체트를 점령한 것도 카자흐스탄에 대한 그들의 약탈을 저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렇지만 러시아는 투르키스탄으로 본격적으로 남하하기에는 주저되는 바가 적지 않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중앙아시아를 경략하려 했던 과거 러시아의 노력들이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시베리아로의 ‘동진’이 눈부신 성공을 거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중앙아시아로의 ‘남진’은 그야말로 좌절의 연속이었다. 그 최초의 시도는 1717년 표트르 대제에 의해서 감행되었다. 그는 아랄해 남쪽에 위치한 히바 칸국을 공격하기 위해서 3500명의 원정군을 편성하여 카스피해 동부 연안의 크라스노보드스크에서 출발시켰다. 그러나 러시아 군대는 사막을 건너는 데 필요한 물자 수송문제와 현지민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해 거의 몰살을 당하고 극히 일부만 살아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실패는 러시아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고 상당 기간 중앙아시아로의 진출은 저지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로의 성공적 진출을 위해서 먼저 카자흐스탄을 확실하게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마침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당시 카자흐족은 크게 세 개의 부족연맹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들이 차례로 러시아에 복속할 것을 청해온 것이다. 즉 1731년에는 소부(小部·Kishi Juz)와 중부(中部·Orta Juz)가, 그리고 1734~1737년에는 대부(大部·Ulugh Juz)가 황제의 신하가 되겠다고 찾아왔다. 물론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동쪽에 있던 유목국가 준가르의 위협, 카자흐 지배층의 내분, 그리고 1720년대에 일어난 ‘대기근’ 등이 그것이다. 러시아는 카자흐인들의 이러한 요청을 러시아 제국에 대한 ‘자발적인 복속’의 의사로 간주하고 그들이 황제의 ‘신민(臣民)’이 된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물론 카자흐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것은 카자흐인들이 궁지에 몰려 잠시 러시아 측에 도움을 요청한 것뿐이지 결코 정치적으로 영구적 종속을 희망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위 ‘자발적 복속’이 있은 뒤에도 카자흐인들은 러시아의 상인들을 약탈하거나 러시아 정부에 대해서도 공공연하게 적대적인 행동을 했는데, 이것은 카자흐인들로서는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충격적이었던 것은 1770년 러시아를 뒤흔든 푸가체프(E. Pugachev)의 반란을 카자흐인들이 지원하고 나선 것이다. 이제 러시아 정부는 카자흐에 대해서 종래와 같은 정책을 계속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보다 직접적 방식으로의 통제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러시아는 카자흐의 칸들을 부족민으로부터 떼어놓아 오렌부르그로 이주시킨 뒤 거기서 연금을 받으며 살도록 했다. 비록 귀족대접을 받으며 호의호식하긴 했지만 부족민으로부터 유리된 칸들은 그저 허수아비였고 러시아 정부의 연금생활자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19세기 전반에는 ‘칸’이라는 지위 자체를 폐지시키고, 카자흐의 수령들로 하여금 러시아 황제의 ‘신하’임을 명시한 협약에 서명하도록 강제하였다. 그리고 이제까지 외무성에서 카자흐인들의 문제를 취급해오던 것을 재무성이나 관련 군구(軍區)로 이관시킴으로써 행정적으로도 카자흐의 독자성을 없애버리고 내지(內地)로의 편입을 완성시켰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카자흐인의 ‘반란’은 끊이지 않았다. 여기에 러시아의 팽창에 반발하는 중앙아시아의 칸국들도 그들을 직접적으로 지원하고 러시아의 대상단(隊商團)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 예가 1836~1846년에 일어난 카심울리(Kasimuli)의 ‘반란’과 히바 칸국의 공개적 지원이었다. 러시아는 히바를 응징하기 위해 1839~1840년 대규모 원정군을 보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무참하게 괴멸되어 표트르 시대에 당했던 것 이상으로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다. 이제 러시아는 카자흐스탄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고 투르키스탄 칸국들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보다 남쪽으로 내려가 확실한 거점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으니, 그 거점은 다름아닌 타슈켄트였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국제정세로 볼 때 러시아의 타슈켄트 점령은 단순히 군사적인 작전으로만 끝날 성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러시아 입장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영국의 반발 가능성이었다. 즉 중앙아시아의 세 칸국의 남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이미 인도를 식민지로 장악하고 있던 대영제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인도에서 자국의 이해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군사적 모험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인도의 앞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중앙아시아를 러시아가 석권하는 것은 영국으로서는 결코 강 건너 불과 같은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인도를 정복한 대부분의 세력들이 바로 중앙아시아에서 아프간을 거쳐서 들어왔다는 것은 역사가 입증하는 바이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있던 러시아 정부, 특히 외무성 관리들은 가능하면 무모한 확장을 자제하고 영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중앙아시아 현지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 장군들의 생각은 달랐다. 전략적으로 볼 때 악크 메체트의 점령은 여전히 문제의 해결이라고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결국 궁극적인 해결책은 중앙아시아를 향해 뻗어 있는 두 개의 전략 라인을 연결하는 것밖에는 없었는데 그것은 곧 타슈켄트 공략을 의미했다. 그러나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2세로부터 그것을 허락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만 러시아중앙정부 역시 현지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인 지시를 하지 않았을 뿐 암묵적으로는 남진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현지 사령관들에게 주어진 선택은 단 하나뿐이었다. 즉 일을 저질러 놓고 보는 것이었다. 일단 러시아의 깃발이 올라가면 황제도 그것을 다시 내리라고 명령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성공하면 훈장감이지만 실패하면 불명예 제대를 각오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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