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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 (8)] 김구
미국·소련의 영향력 벗어난 남북단일정부 수립 꾀해
김규식과 함께 평양 가서 북한 의사 타진… 단독정부 수립 주장하는 이승만과 결별
‘신익희의 쿠데타’로 리더십에 타격 입고 냉엄한 국제정치의 현실에 부딪쳐
▲ 1948년 남북 대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38선을 넘으며 찍은 기념사진. 왼쪽부터 선우진, 김구, 아들 김신.(왼쪽) 1948년 4월 평양 을밀대를 찾은 김구 선생과 일행.(가운데) 미 군정기의 이승만, 하지 중장.

나아가 남북한에 분단정부가 수립되기 직전인 7월 19일 “미·소 양군 철퇴 후 남북협상에 참가하였던 정당·사회단체의 주동으로써 전국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자주 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하려 한다”고 밝힌 것처럼 그의 건국관의 요체는 미·소의 영향력을 극복하고 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역량에 의해 통일된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냉전체제의 최전선이 되어버린 한반도에서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한국인의 자유의지로 그들이 원하는 나라를 세우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분통 터지는 일이었지만 ‘반외세 자주’의 구호가 파괴력을 발휘할 수 없는 정치현실이었다. 김구가 맞닥뜨린 국제정치의 벽은 너무 높고 두꺼웠다.

한때 반(反)파시스트 국제연대 관계를 형성하였던 미국과 소련은 세계질서의 주도권을 다투는 경쟁관계가 되었다. 두 나라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반도 점령을 양보하지 않았고 그 틈새에서 한국인의 통일민족국가 건설의 꿈은 꺼져 갔다. 김구의 꿈도 사라져 갔다.

이제 그가 헤쳐 나갔던 건국의 고비를 더듬어 보자. 미 군정의 좌우합작운동 지지가 이승만(李承晩)과 김구를 견제하고 중간파를 양성하는 성격이 짙었던 예 등을 감안할 경우 해방정국의 정치상황은 미국 및 미 군정에 대한 치밀하고 분석적인 대처능력을 필요로 했다. 국제환경은 ‘민족’을 뛰어넘는 시야와 사고로써 ‘민족’을 되돌아볼 것을 주문했다. 관념적이고 이상주의적인 모습이 아닌 현실적이고 전략적인 대응이 요구되었다고 하겠다.

미 군정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존재에 대해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권위를 일정 수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과, 반대로 군정의 통치권 확보를 위해 그의 권위를 부정해야 하는 사실에 곤혹스러워 하였다. 김구 역시 그를 향한 미 군정의 눈길을 의식했고 미 군정을 지렛대로 삼아 유리한 국면을 만들어야 한다는 욕망을 느꼈을 법도 하다. 하지만 오랜 세월 해외에서 활동한 그의 주위에는 미 군정 측과 교감하고 통로 역할을 할 수 있는 채널이 부재했다.

해방정국기는 싫든 좋든 미 군정 및 미국과의 의사소통이 필요한 상황이었기에 저항적 민족주의자에서 타협과 절충을 수용해야 하는 정치가로 변신하는 과제는 건국운동의 주도권 장악이라는 측면에서도 긴요한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해방정국기는 혁명의 시기가 아니라 정치력이 요구되는 시대였다.

한편 1946년 가을의 이른바 ‘신익희(申翼熙)의 쿠데타’는 임정과 김구의 리더십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혔다.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가 임정 주석에게 상처를 입히는 결과로 귀착된 이 사건은 김구의 리더십도 변해야 한다는 경고음이었다. 이상을 좇기에 앞서 당면한 현실을 직시하라는 일깨움이었다.

물론 김구로서는 이 같은 지적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분단정부 수립에 협력할 수 없다”며 낭만주의자적인 풍모마저 띠었던 그로서는 현실과의 타협을 위해 이상을 저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정치인’으로서 김구의 제약이었다.

다음으로 건국운동의 또 다른 주역이었던 이승만과 김규식(金奎植)의 관계를 살펴보자. 스스로 한미(寒微)한 신분 출신임을 내세워 임정의 최고 반열에 오르기를 사양했던 김구는 이승만에 대해 예의를 갖추고 자신의 감정과 의사표현을 절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태평양전쟁 발발 이래 미국의 국제정세 주도력을 목도했고 미 군정과 긴장관계에 있던 그로서는 이승만의 국제정치에 대한 식견과 외교적 수완 등에 의지하고 도움도 받고 싶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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