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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 (8)] 김구 그는 누구인가
대의(大義)에 충실했던 독립운동의 대부
임정의 중심인물로 활약… 동학농민ㆍ의병운동 거쳐 신민회에서 활동
▲ '백범일지'의 표지
이후 임정 경무국장으로 시작해 1945년 11월 임정 주석 자격으로 환국할 때까지 임정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독립운동의 역경 속에서도 기억을 되짚어가며 1928년 상하이에서 ‘백범일지(白凡逸志)’를 쓰기 시작하여 이듬해 상권을 탈고하였다. 이후 1942년 충칭(重慶) 화평로 오사야항 1호 임정청사에서 하권을 쓰기 시작하였고 해방정국기에 소설가 이광수(李光洙)가 다듬고 정리하여 1947년 말 초판이 발간되었다.

그러면 평범한 인간으로 사는 데 자족하던 그에게 무슨 마력이 있어서 이봉창·윤봉길 의사와 중국 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의 학생들, 또 한국 특무대 독립군과 OSS 국내정진대 대원들은 자신의 운명을 김구에게 맡겼을까.

1926년 말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李東寧)이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할 것을 권고하였을 때 그는 자신의 일천한 출신 배경을 이유로 사양했다. 이는 그의 인생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 그가 국무령에 취임한 직후 국무령제도를 폐지하고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헌을 단행한 것은 그의 의식구조를 설명해 준다.

그는 독재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국무령제 대신 모든 국무위원을 동등한 지위에 설정함으로써 권력의 집중을 막고자 시도했다. 이러한 그의 사고는 1940년대 임정의 주석제 채택과도 상통한다. 그는 수평의 리더십을 통해 단결과 통합을 이끌어 내려고 노력했다.

파벌 양상이 임정 진로에 중대한 장애 요인으로 부각되던 1920년대 중반 김구의 선택은 임정 존립을 위한 관건이었다. 생활이 어려워 모친이 “한인사회 모두가 살아나갈 궁리를 하는데 너만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것이냐”고 말했지만 김구는 “죽어도 임정을 떠날 수 없다”고 했다(신동아 1986년 8월호)는 일화는 자기희생을 전제로 대의(大義)에 충실하고자 한 그의 단면을 보여주는 예이다.

그의 풍모는 동지·동포와 함께 하며 같이 나누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상하이 한인사회의 골목길에서 마주쳤을 때 편안함과 든든함을 느끼게 하는 체취, 그것이 인간 김구의 경쟁력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숙이고 낮춤으로써 남들이 우러러 보는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 이래 중국 정부로부터의 재정지원을 토대로 독립운동을 주도함으로써 임정과 한인사회의 최고 실력자 반열에 올랐지만 그는 여전히 이전의 모습 그대로 살았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당신의 생일상을 차릴 돈으로 권총 두 자루를 사서 “독립운동에 쓰라”고 내놓으신 어머니가 있었다. 그가 임정과 임정 가족의 목줄을 책임졌음에도 그에 대한 비판이나 비난이 뒤따르지 않은 사실은 나와 내 가족 우선이 아닌 한인사회 모두를 아우르며 추슬러 간 그의 리더십을 환기시켜 준다.

1949년 6월 26일 거처인 경교장(京橋莊·현재 신문로 강북삼성병원 내 소재)에서 육군 대위 안두희에 의해 시해되었다. 자주적인 민족통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남북의 분단정부 수립에 반대하던 그가 조국에서 동포의 손에 유명을 달리하였다는 사실은 한국 현대사의 아이러니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으며 효창공원 뒤 백범기념관 옆에 안장되어 있다.

한상도 건국대 교수ㆍ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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