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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 (8)] 김구 그는 누구인가
대의(大義)에 충실했던 독립운동의 대부
임정의 중심인물로 활약… 동학농민ㆍ의병운동 거쳐 신민회에서 활동
▲ 1945년 8월 김구 임정 주석이 OSS 책임자 도노번 장군과 광복군의 국내 진입 작전을 합의한 뒤 나오고 있다.
1992년 대통령 선거 때 각 당 후보에게 ‘존경하는 인물’을 물었다. 모든 후보가 ‘김구 선생’을 꼽은 기억이 난다. 지금도 무작위로 뽑은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던질 경우 김구가 ‘1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 독립과 통일을 위해 바친 생애에 대한 존경심과 분단의 희생자로 보낸 데 대한 아쉬움이 뒤엉킨 때문이리라. 왜 우리는 오늘 그를 되살리려고 하는 것일까.

그는 1876년 7월 11일(음력) 황해도 해주읍 백운방 텃골(현재의 벽성군 운산면 오담리 파산동)에서 아버지 김순영(金淳永)과 어머니 곽낙원(郭樂園)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난 때는 강화도조약 체결 직후로 조선이 굳게 닫친 문을 열면서 동시에 일제의 마수가 뻗치기 시작한 시기였다.

어릴 때 이름은 창암(昌巖)이었고 19세 때 창수(昌洙)로 고쳤다. 38세 때(1913년) 다시 구(九)로 바꾸었다. 가장 미천하고 무식한 사람들도 자신과 같은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뜻에서 백정의 ‘백(白)’과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호를 ‘백범’이라고 하였다.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김구는 9세 때부터 한글과 한문을 배워 이야기책을 읽을 수 있었고 서당에서 한학을 배워 통감과 사략 등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학문에 대한 갈증은 김구로 하여금 해외 망명생활의 고달픔 속에서도 꾸준히 일기를 쓰도록 이끌었고 붓글씨로 자신을 가다듬는 구도자(求道者)의 모습으로 이어졌다.

▲ 백범 선생의 부인 최준례 여사(오른쪽)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운동의 참여를 통해 그의 근대민족의식은 틀을 갖추어 갔다. 김구는 21세 때(1896년) 일본 육군 중위 스치다(土田讓亮)를 처형함으로써 일제의 ‘국모시해’를 응징하는 ‘백성의 도리’를 다하고자 하였다. 3개월 후 체포되어 해주감옥과 인천감옥에서 복역하던 1898년 3월 탈옥에 성공한다. 이후 김구는 근대민족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김구는 1904년 29세 때 최준례(崔遵禮)와 혼인한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의법청년회ㆍ서명의숙ㆍ해서교육총회 등을 거쳐 신민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황해도 안악에 양산학교를 세웠으며 재령의 보강학교 교장 등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에는 이른바 ‘안명근 사건’으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

1914년 7월 가출옥으로 석방되었고 이후 소학교 교원으로 활동하였다. 3·1운동 직후 경의선 열차편으로 압록강을 건넜다. 안동(지금의 단둥)에서 이륭양행(怡隆洋行) 소속의 배를 타고 상하이에 도착한 때가 1919년 4월 중순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정)의 수립을 세계에 알리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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