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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 (7)] 송진우
“건국 위해선 정치훈련 필요”미 군정에 협력
미국과 대립하는‘감정적인 반탁’안돼… 국민과 함께하는‘신중한 반탁’주장
건준 실패 예견한 뒤 민족지도자들의 총단결 외치며 한민당 창당 주도
고하가 해방 전 일본의 행정권 이양을 거부하고 해방 후 국민대회를 준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고하는 “민중이 승인하지 않는 지도자는 일종의 괴뢰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연합국과 민중만이 정권을 줄 수 있으며 일본 정부나 한 개인이 정권을 주고받을 수 없다’는 논리였다. 결국 정권인수 체제인 국민대회를 위해 ‘국민대회준비회’를 발기한 고하는 몽양의 건국준비위원회와 대립했으며 1945년 9월 7일 제1회 준비회를 소집했다.

또한 고하는 국내외 민족 지도자의 총집결을 주장했다. 이는 당시 아직 중국 충칭에 있던 임시정부를 염두에 둔 행동이었다. 그는 “3·1운동의 정신을 지지해야 한다”면서 “임시정부가 그 정신을 이어받아 법적인 정통성을 가진 정부”라고 간주했다.

▲ 일제 치하 독립운동으로 수감중인 송진우.
따라서 고하는 “좌익세력이 미군 진주(9월 7일) 이전에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9월 6일)한 것은 경거망동”이라고 비판하면서 “임시정부의 환국을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하는 “정권인수 체제를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맞추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건국은 패전국 일본인이 아닌 승전국인 연합국에서 인수 받아야 하고 임시정부를 비롯한 국내외의 민족 총역량을 집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따른 것이다.

그의 국민대회 방식은 좌익의 인민대회 방식과 대비된다. 국민대회 방식만이 민족의 총의를 모으고 분열을 극복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 고하는 생각했다. 국민대회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려 했던 고하의 구상은 철저한 준비론의 산물이었으며 국제정세의 현실을 직시한 구상으로 후일 평가되었다.

지나간 역사에 가정을 하는 것이 부질없는 짓이다. ‘만약 국민대회가 열려 모든 역량이 집결되고 연합국의 승인을 얻을 수 있었다면 분단과 전쟁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는 가정을 할 수도 있는 대목이다. 이로써 고하는 해방 전후에 아무런 구상과 준비 없이 은인자중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또 고하는 건준의 실패를 예견했다. 건준과 인공이 연합국의 대표격인 미국으로부터 부정되었으므로 국민대회 방식이 결과적으로는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국민대회가 당시 민중의 광범한 지지를 얻지는 못했으며 각 정파들이 자파 중심적 노선에 따라 각각 건국에 대처했으므로 국민대회 소집론도 여러 대안 중의 하나로 귀결되고 말았다.

이에 송진우는 민족진영의 집결체로서 한국민주당(이하 한민당)을 준비했으며 9월 16일 그 결성을 주도하고 사실상의 당수인 수석총무에 취임했다. 그러나 고하는 민족진영만의 배타적 지도자는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사회주의도 포용하려 했다. 단지 원칙 면에서 양보하지 않으려는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였을 뿐이다.

고하는 ‘선봉’ 1946년 1월호에 실린 ‘연두소감’에서 현단계를 사회민주주의 혁명단계로 보았으며 “토지는 소작권 설정에 의한 국유제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 일본제국주의가 물러간 혁명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송진우가 암살된 서울 원서동 자택 별채.
그런데 그의 진보적 이념은 암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공산당의 주장처럼 초기 한민당은 반동적 정당이 아니었다. 공산당이 너무 급진적이었기에 이를 제어하려 했던 고하가 ‘우파만의 지도자’인 것처럼 몰렸던 것뿐이다. 실제 그의 이념은 민족적 우파였다. 만약 고하가 살아있었다면 후일 한민당이 그렇게 우경화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1948년 정부수립 과정에 참여한 세력의 정치적 스펙트럼의 폭이 넓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1945년 12월 30일 밤, 고하는 서울 원서동 자택에서 암살당했다. 고하를 암살했던 세력은 “고하가 찬탁론자이기 때문에 암살했다”고 사후적으로 합리화하려 했다. 반대파 암살을 사후적으로 호도하려는, 사실과 다른 주장이었다. 왜냐하면 12월 30일은 아직 찬탁이 전면에 등장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찬탁과 반탁의 첨예한 대립 구도는 이듬해인 1946년 1월 2일 조선공산당의 모스크바결정 지지노선 전환 이후에 등장했다. 따라서 그의 성장을 두려워하는 세력이 암살한 후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찬탁론자로 덮어씌운 것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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