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기사 경로


기사 본문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 (7)] 송진우 그는 누구인가
일제 때부터 건국 준비 주장한 민족주의자
국제 정세 파악 위해 단파방송 도청… 언론사 사장으로 실력배양·자강운동 전파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는 교육자이자 언론인이자 정치가였다. 일제시대에는 준비론을 견지한 독립운동가였으며 해방 직후에는 정당의 대표였다. 그는 한국 보수정당의 비조(鼻祖)요 태두(泰斗)였고, 정치적 식견과 수완이 출중한 지도자였다.

그는 조선왕조의 국권이 위태로웠던 1890년 전라남도 담양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기삼연(奇參衍), 김직부(金直夫)에게서 한학을 배웠다. 담양학교를 세웠던 부친 송훈 선생은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맺어질 때 15세 소년이었던 고하에게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신학문을 배워야 한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 1945년 12월 피습 수일 전 회의를 마치고 한민당사를 나서는 송진우. 고하는 암살러시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1907년 창평(昌平)의 영학숙(英學塾)에 들어가 고광준(高光駿), 김성수(金性洙) 등과 영어 등 신학문을 배우다가 평생의 벗 김성수와 함께 가족 몰래 일본으로 건너갔다. 1910년 4월 와세다대학 고등예과에 입학하였으나, 그 해 8월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자 충격을 받고 20세 청년의 몸으로 귀국했다. 그는 귀국 후 기삼연을 찾았으나 스승은 이미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1908년 일본군에 의해 총살된 뒤였다. 부친 송훈은 흥분하는 고하를 실력배양론 전술의 하나인 기회론의 입장에서 진정시켰다고 한다.

고하는 1911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 법과에 입학한 후 실력배양론, 자강운동론의 사상적 틀을 형성했다. 1915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고하는 애국 계몽운동적 교육과 언론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1918년 만 28세 되던 해 고하는 인촌 김성수에 이어 중앙학교 제10대 교장에 취임한다. 그는 중앙학교 교장으로서 학생들에게 “실력을 양성하여 독립의 기회를 엿보자”는 기회론을 전파했다.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1년 반의 옥고를 치렀다. 1920년 10월 30일 출감한 고하는 담양에서 학교설립 모금운동을 벌이다가 같은 해 겨울 다시 경찰에 붙잡혀 담양경찰서 유치장에서 지내게 된다. 고하는 유치장 안에서 독립운동을 추진할 때 항상 국제정세 흐름 속에서 해외에서 활동 중인 독립운동자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고하는 1921년 9월 15일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했고, 1945년 사망할 때까지 동아일보의 사장·고문·주필 등을 역임했다. 고하는 언론인과 교육자로서 독립운동의 정신적 기반 확충에 기여했지만 무장투쟁적 독립운동가는 아니었다. 그는 민족의 혼을 지키면서 건국을 준비하는 준비론자의 면모를 보였다. 따라서 식민지시대 송진우의 사상은 교육중심주의, 계몽주의, 신중론으로 집약될 수 있다.

1 · 2


스폰서




홈
전체기사
맨위로

인기기사

커버스토리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