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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 (6)] 신익희
정치공작대· 행정연구반 조직해 건국 준비…"우리가 살 길은 민주주의 뿐"
신익희는 자신의 아호인 ‘해공(海公)’을 “바다와 같이 넓은 마음으로 추호도 사심 없는 공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뜻”이라고 스스로 풀이한 바 있다. 해공에게 있어서 해방된 조국의 현실은 마치 일제하에서 풍찬노숙(風餐路宿)하면서 독립운동을 했던 것처럼 건국운동으로 매진하게 만들었다. 해공은 임시정부의 초대 내무차장으로 참가한 후 조국광복을 위하여 해방이 되는 그날까지 헌신해 왔다. 임시정부가 내분에 휩싸여 일대 혼돈에 빠졌을 때도 해공은 민족해방전선에서 이탈하지 않고 중국군 장군이 되어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한·중 합작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해방 직전에는 의열단에 가입하여 일제에 대한 폭력혁명을 지휘하였고 중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동지들을 규합하여 조국광복을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강력한 투쟁을 전개했다.


▲ 1945년 이승만 박사의 귀국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환영사를 읽는 신익희.

이렇게 거침없는 반일 민족저항운동을 전개했던 해공의 입장에서 보면 해방된 조국의 모습은 또 다른 시험대였다. 그는 환국 직후 개인의 행복과 쾌락을 뒤로 접고 건국의 기틀을 잡고 자유민주주의를 국가이념으로 하는 새로운 국가를 건국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다. 해공의 정치사상은 민주주의, 애민주의, 그리고 애국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 그에게서 민주주의는 자신이 행하는 모든 활동의 근거이자 자신이 나아가야 할 최종적 귀착지였다. 해공은 “오늘날 우리의 유일한 살길은 민주주의입니다. 국내 생활도 민주주의라야 잘 살아갈 수 있고 국제원조도 민주주의를 실행해야 받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의 토대에는 애민주의와 애국주의가 깔려 있다.

그는 환국 후 우선 정치공작대(政治工作隊)를 결성한다. 정치공작대는 일반 민중과 활발히 접촉하여 활동한 지 3주일 만에 전국의 면 단위 조직까지 완료하였다. 이로써 정치공작대는 혼돈의 시기인 해방정국에서 건국을 위한 조직으로서의 기틀을 잡아나갔다. 임시정부의 내무부장으로서 그는 자유민주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 모든 활동의 초점을 맞추었다.

해공은 정치공작대의 결성에 이어 행정연구반을 조직한다. 행정연구반은 신생국의 행정조직 구성을 위한 준비 기구였다. 이때 해공은 “비록 친일의 경력이 있더라도 민족을 근본적으로 배반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개과천선(改過遷善)의 기회를 주어 새로운 조국에서 일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공만큼 일제로부터 핍박을 받은 사람도 흔치 않았다. 그러나 해공은 조국의 현실이 너무나 많은 문제로 인해 표류하고 있기에 행정경험이 있는 사람을 등용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건국 사업을 착착 진행하고 있는 와중에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안이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채택되었다.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안은 한민족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강대국인 미국과 소련 간에 이루어진 정치적 책략의 결과물이었다. 임시정부의 내무부장인 해공은 신탁통치안이 전해진 다음 날인 12월 29일 밤에 서울 시내의 9개 경찰서장을 소집하여 강력한 반탁운동을 전개할 것을 지시했다. 해공은 12월 31일에 이르러서는 임시정부 내무부장 자격으로 ‘국자(國字) 1호’와 ‘국자 2호’로 명칭된 임정포고문을 직접 발표하였다. 여기서 해공은 ‘임시정부가 직접 국내 행정과 치안 및 경제를 이끌고 가겠다’는 자주정부 수립을 천명함으로써 미 군정에 정면 대결하였다. 비록 이러한 해공과 임시정부의 민족적 반탁운동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정부수립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우리 건국운동사에 많은 의미를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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