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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 (6)] 신익희 그는 누구인가
항일 무장 독립운동 펼친 ‘민주주의 신봉자’
3·1운동 주도, 임정서 주요 역할…문맹퇴치 위한 계몽활동도 벌여
▲ 한강 백사장 유세를 마친 직후 자택에 돌아온 해공. 해공의 마지막 사진이 되었다.
해공 신익희는 한 인간의 삶이라고 하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해공은 1894년 7월 11일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출생하던 때는 조선은 이미 국운이 기울어 망국의 길을 재촉하던 시기였다.

일본 제국주의는 1876년 강제로 조선을 개국시켰다. 이때부터 한반도에는 제국주의의 침략이 노골화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조선의 국력은 더욱 쇠퇴해간다. 급기야 1894년 한반도 지배권을 놓고 중국과 일본 간에 마지막 혈투를 벌였는데, 이것이 청일전쟁이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사실 조선의 운명은 결정되고 말았다.

해공은 조선의 운명이 끝난 1894년에 태어났다. 이후 전개되는 해공의 삶을 보면 한국사의 곡절과 그대로 겹쳐진다.

신숭겸(申崇謙) 장군을 시조로 하는 평산 신씨의 31대손인 해공은 어릴 때부터 남다른 주목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신 판서’로 알려진 64세의 아버지 신단 공과 어머니 동래 정씨 경랑 여사 사이에서 태어난 해공은 이미 다섯 살 때부터 천자문을 공부하여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다. 그는 아홉 살에 이르러서는 사서삼경을 독파하였고 열 살 때는 집안에 있던 모든 책을 독파하여 장안에까지 회자되었다. 글씨도 명필이어서 어린 시절부터 주변에서 해공의 글씨를 받으러 오는 사람까지 생길 정도였다.

1905년 해공의 정신적 지주였던 아버지가 75세의 나이로 타계한다. 유가(儒家)의 관습대로 3년상을 마치고 연안 이씨인 참판 명재의 셋째 딸인 이승희 여사와 결혼을 한다. 이 여사와의 사이에서 정완(貞婉)과 하균(河均)를 낳았다.

국운이 기울어가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해공은 신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08년 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입학하여 1910년 학교를 졸업한다. 나라가 망한 뒤 그는 청운의 뜻을 품고 19세 때인 1912년 일본 와세다 대학에 유학을 떠나게 된다. 여기서 그는 안재홍(安在鴻), 송진우(宋鎭禹) 등과 함께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조직하여 처음에는 총무 일을 보다가 나중에 회장이 되었다.

학우회 기관지 ‘학지광’을 만들어 조선동포의 계몽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해공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1911년 백남훈(白南薰), 이광수(李光洙), 김도연(金度演), 정노식(鄭魯湜), 전영택(田榮澤) 등과 비밀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학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조선독립을 위해 투신하기로 맹세하면서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물에 타 마신다.

이때부터 해공은 반일 구국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 일환으로 그는 방학 때면 고향에서 애국 계몽운동을 펼쳤는데, 1913년 여름 자신의 집 사랑방에 광동의숙을 차려 놓고 주민의 의식을 깨우쳤다. 23세 때인 1916년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후 해공은 학창시절 만들었던 광동의숙을 확장하여 동명강습소를 개설하였다. 해공은 이곳에서 문맹퇴치와 개화사상 고취에 모든 정열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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