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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4)] 김성수, 한민당 당수로 첫 총선에 참여
연합야당인 민국당 창당해 개헌 시도…민주화의 정치적 초석 놓아
총선거 결과 국회의원 의석 분포는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55석, 김성수의 한민당이 29석, 이청천(李靑天)의 대동청년단이 12석, 이범석(李範奭)의 조선민족청년단이 6석, 군소 정당 13석, 그리고 무소속이 85석이었다. 표면적으로 보면 그것은 한민당에 상당히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그러나 다른 정당의 명의로 출마하여 당선한 한민당 계열 사람까지 고려한다면 한민당은 국회에 사실상 84석의 의원을 확보한 셈이라는 계산도 가능하다. 실제로 당시 선출된 많은 국회의원은 한민당 지도자들이 입각할 것을 기대하면서 내심 한민당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선거 후 ‘이승만이 새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김성수가 국무총리가 될 것’이라는 기대는 거의 기정사실로 굳어 가고 있었다. 한민당의 영향력 그리고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는 데 한민당이 기여한 사실을 고려한다면 당연한 기대였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이승만은 김성수를 재무장관으로 지명하고 한민당 의원들은 각료 구성에서 모두 배제했다.
▲ 1947년 2월21일 한민당 김성수 당수(오른쪽)가 AP도쿄 지국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한민당 지도부는 이승만이 김성수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한 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김성수 자신도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김성수와 한민당 지도부는 이승만의 제의를 거절했다. 결국 김성수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건국이 선포되는 순간 축하행사 단상에 야당의 당수로서 앉아 있었다.

갈수록 대통령으로서의 지위를 강화해 나가는 이승만을 견제하고, 당의 지지기반을 넓혀 당세를 확장하기 위해 김성수는 1949년 민주국민당(민국당)을 창당하였다. 그것은 김성수의 한민당, 신익희(申翼熙)의 대한국민당, 이청천의 대동청년단의 연합이었다. 연합을 통한 민국당의 창당은 의원수의 분포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민국당이 70석으로 가장 많은 의석수를 보유하게 되었고, 나머지 130석은 무소속을 포함한 다른 4개 정파가 분점하게 되었다.

거대 야당으로서 민국당은 이승만 정부의 권력에 도전하였다. 1950년 1월 20일 민국당은 ‘대통령제를 의원내각제로 바꾸자’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에 이승만은 강력한 개헌 반대 캠페인을 시작했다. 1950년 3월 14일 시행된 최종 투표의 결과는 참석한 179명 가운데 79명만이 개헌에 찬성표를 던진 것으로 나타났다. 반대가 33명, 기권 66명, 무효표가 하나였다. 이는 헌법개정을 위해 민국당이 기대했던 144표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 이 패배가 민국당에는 심각한 타격을 주었던 반면 이승만에게는 승리의 축복을 가져다 주었다.

민국당의 개헌 시도 이후 이승만은 국회와 비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민국당이 제안한 개헌투표가 실시되기 전에 이승만은 “2대 국회의원 선거를 1950년 5월 10일에 실시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개헌투표 승리 후 그는 국회의원 선거에 대해 모호한 입장으로 다시 선회하였다. 미 국무장관 애치슨이 “선거를 실시하지 않는다면 한국에 대한 모든 원조를 중단할 것”이라는 경고를 듣고서야 이승만은 5월 30일을 선거일로 공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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