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기사 경로


기사 본문

[8·15특집/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 해방직후 역사 논쟁
대한민국 정체성 부정하는 일부 좌파세력과 '역사 해석 전쟁' 지속
북한, 사회주의, 과거사, 자주독립…. 해방 이후 60년 동안 변함없이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구는 4대 논쟁의 주제어다. 특히 해방 직후 3년의 정치사는 바로 이 논쟁을 현실적 파워로 관철하려던 이야기다. 외세로부터의 독립이 있었고 국가건설을 향한 피의 투쟁이 있었다. 그런데도 60년이 지난 지금, 건국을 둘러싼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

‘북한과 함께!’ 해방 직후 정치 지형도에서 보자면 이승만과 한민당 정도를 제외한 거의 모든 정파들이 이 같은 낭만에 휘둘렸다. 남로당의 박헌영은 말할 것도 없고 소위 좌우합작노선의 여운형·김규식도 ‘북한과 함께’였으며 김구 또한 결국은 북한을 찾아가는 무리수를 범했다.

이승만은 그런 면에서 독보적이었다. 한동안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 수립론이 ‘분단의 원인 제공’으로 간주돼 이승만은 늘 분단의 책임자로 비판받았다. 1980년대 이념서적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널리 읽히면서 이승만에 대한 그 같은 비판은 하나의 진리처럼 자리잡았다. 심지어 우파 성향의 학자들조차 한때 이런 인식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였다.
▲ 1948년 8월 15일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


이승만시대를 전공한 김일영 교수(성균관대 정치학)는 “당시만 해도 군사정권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집권세력의 출발점인 이승만시대를 부정하는 것이 유행처럼 돼버렸다”며 “민주화가 이뤄지고 사회주의권이 몰락하면서 이승만 재조명의 필요성은 높아졌고 그때부터 시작된 학문적 관심이 최근 이승만 재조명 붐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김일영 교수는 “지금 보자면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은 미래를 꿰뚫어본 용단(勇斷)이라고 부를 만하다”고 밝혔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려는 국내의 일부 좌파세력이 늘 이승만을 궁극적 타깃으로 삼는 것도 ‘북한 배제’를 강조했던 이승만을 부정해야만 자신들의 주장이 먹혀들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실 북한 문제는 1980년대 후반까지는 사회주의 문제와 직결돼 있었다. 그러다가 사회주의 붕괴 후에는 민족주의와 연결되었다. 적어도 현재의 이념 및 정치 지형도만 놓고 본다면 민주노동당 정도가 공식적으로 사회주의를 내걸고 있을 뿐이다. 학계나 지식인 사회에서 사회주의 논쟁은 이미 죽은 논쟁이 돼버렸다. 다만 이념으로서의 사회주의가 아닌, 가치로서의 사회주의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둘러싼 각종 논쟁과 장애인, 동성애자 등의 목소리를 담아내려는 노력이 그것이다. 이런 논쟁은 서구에서 말하는 포스트모던 논쟁의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거대담론은 잦아들고 생활 세계에 바탕을 둔 미시적 쟁점들이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이다.

지금은 많이 시들해졌지만 과거사 논쟁은 언제든지 불거질 수 있는 인화성을 갖고 있다. 1987년 체제 출범 이후 등장한 역대 정권들은 하나같이 과거사 ‘심판’에 열을 올렸다. 노태우 정권은 전두환 정권 청산에 집중했고 김영삼 정권은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이름으로 전두환·노태우 정권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했다. 결국 두 사람은 감옥에 가야 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타깃으로 한 대한민국사 다시 쓰기는 김대중 정권의 등장과 함께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김대중 정권의 탄생은 지식사회에서 보자면 좌파(左派) 세력의 본격적인 등장과 맥을 같이했다. 다양한 분야에서 숨죽이고 있던 좌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특히 해방 직후의 쟁점들이 대부분 이 시기에 재점화됐다. 특히 주목을 요하는 것은 ‘북한과 함께!’의 요구가 되살아난 것이다. 물론 이는 6·15 남북정상회담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이뤄졌다. 그러나 IMF라는 국난 사태를 맞아 여타의 쟁점들은 본격화되지 못했고 물밑에서 들끓었다.

2002년 노무현 정권의 등장은 해방 직후 논쟁이 재연되는 사태로 이어졌다. 북한, 민족주의, 과거사 등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특히 이 정부는 대한민국 60년은 물론이고 일제하 36년 강점기까지 재평가의 도마에 올려놓았다. 논쟁은 학술적 차원에 그치지 않았고 각종 국가기구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경쟁적으로 과거사 ‘바로잡기’에 나섰다.

그러나 정권에 의한 역사 재평가란 애당초 무리수였다. 역사는 역사학자의 몫이다. 권력의 잘잘못을 또 다른 권력이 재단한다는 것은 오만일 뿐이라는 것은 2년도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이미 각종 위원회들은 동력을 상실하고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져 표류하고 있다. 국민의 상식이 몰상식한 정권의 과거사 재평가 시도에 거부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이제 현실적인 논쟁의 테마로 남아 있는 것은 주한미군 기지 이전 반대로 표출되고 있는 자주독립 문제다. 사실 ‘자주독립’은 이승만의 구호였다. 김구는 보다 적극적이었다. 반탁운동의 의미는 자주독립에 관한 논쟁에서 우파가 좌파에 승리를 거뒀다는 데 있다. 반면 박헌영은 소련의 지령을 따른 북한노선을 추종해 찬탁에 나섰다가 남한 대중의 지지를 상실했다. 자주독립보다 사회주의 노선을 따른 결과였다.

김구는 완전한 자주독립을, 이승만은 상대적 자주독립을 외쳤다. 한쪽은 이상을, 한쪽은 현실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상대적 자주독립은 미국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6·25 직후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우리의 자주독립이 상대적이고 조건부적인 자주독립임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것이 미국에의 예속이 아님은 우리 스스로 조약체결을 맺으려 했고 미국은 한사코 반대했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1980년대 이후 한국의 좌파세력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들고 있다. 4대 쟁점 중에서 지금까지도 휘발성이 있는 사안은 바로 이 자주독립의 문제다. 나머지 세 가지 문제는 현재 자주독립의 문제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완전한 자주독립이라는 이상은 북한과 김구를 같은 맥락에 두게 만들었다. 국내의 좌파들이 유일하게 우파 지도자 중에서 김구에게 높은 점수를 주는 것도 그 때문이다.

현재 한국군의 작전권 반환을 둘러싼 논쟁에서 드러나듯 여전히 대한민국은 군사외교적으로 미국의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시각이 강력하다. 노무현 정부의 어설픈 자주독립론이 치러야 하는 불필요한 대가를 인식한 사람들이 늘어가면서 다시 완전 자주독립과 상대적 자주독립의 논쟁은 후자 쪽으로 기울고 있다.

이미 역사에서 일차적으로 정리된 논쟁들이 60년이 지난 시점에 되살아나는 이유에 대해 정상인 교수(서울대 사회학)는 “물론 그동안 우파의 잘못도 있었겠지만 역사를 역사로 보지 않고 현실정치에 끌어들이려는 세력의 무지함도 크게 작용했다”고 말했다.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기자(hwlee@chosun.com)



스폰서




홈
전체기사
맨위로

인기기사

커버스토리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