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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특집]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1) 김규식
분단 막으려고 좌우합작 처음으로 제기
미국과 소련의 합의를 통한 통일을 모색 …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도 추진
▲ 우사 김규식 박사
극단적인 이념대립과 좌우갈등으로 혼란이 극에 달했던 해방정국에서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은 정치지도자로서 선각자적인 위상을 지닌다. 광복과 건국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극좌와 극우의 반대를 무릅쓰고 좌우합작을 실현시켜 통일정부를 수립하려 했고, 남과 북의 정치지도자들이 만나는 남북협상 개최를 제의하여 조국의 분단을 막으려고 끝까지 노력했던 몇 안 되는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우사는 권력으로부터 배제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노선을 끝까지 견지했는데, 이와 같은 그의 노선은 오늘날 통일문제를 접근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특히 좌우합작은 민족의 분열이 가시화되는 시점에서 이를 극복하려 한 최초의 시도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남북협상은 민족의 분열이 고착화되는 시점에서 이를 막기 위한 최후의 노력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부주석으로 임정 요인들과 함께 귀국하였으나, 이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독자적인 노선을 고수했다. 신탁통치문제가 대두된 이후 임정이 취한 노선이 냉엄한 국제정치 현실을 외면한 비현실적이고 극우적인 노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동시에 그는 미군정과 우호적인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의 단독정부 수립방침에는 결코 호응하지 않았다.

38선이 획정되어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의 남과 북에 각각 주둔해 있는 상황이므로, 미ㆍ소 양군 대표로 구성된 미소공동위원회(이하 미소공위)를 통해서 수립되는 정부만이 진정으로 민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통일정부가 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미국과 소련의 합의에 의해서만 통일된 정부를 수립할 수 있으므로 양국의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민족이 갖고 있는 모든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지, 어느 일국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이와 같은 우사의 생각은 1946년 5월 미소공위가 무기 휴회되면서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게 된다. 미소공위 휴회 이후 좌우 양 진영으로 나뉘어 첨예한 갈등과 대립을 반복하는 상황에서 좌우합작을 추진했기 때문이었다.

▲ 1920년 3월1일 미국 워싱턴에서 3·1절 1주년 기념식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한 임정 구미위원부 간부들. 앞줄 가운데가 이승만 박사, 그 오른쪽이 김규식 박사.
당시 우익진영은 자율정부 수립이라는 명분으로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전개했고, 이에 맞서 좌익진영은 총력을 기울여 미소공위 재개운동을 전개했다. 기본적으로 이는 자신들의 권력 장악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전략적 판단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처럼 좌우 양 진영이 정략적으로 별도의 운동을 벌여나가는 상황에서 우사는 좌우가 반목만 할 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합의를 이루어 미ㆍ소의 협조를 이끌어내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이의 추진에 적극 나섰다. 일차적으로 합의가 가능한 중도세력이 뭉치고 이를 주축으로 양 진영의 합작을 도모하는 좌우합작운동에 나선 것인데, 이러한 우사의 노선에 미군정도 동의를 표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이념을 초월하여 좌우가 합작해야 한다는 우사의 생각에 대해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며 동참한 정치지도자는 조선인민당의 당수인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이었다.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인민공화국을 선포한 바 있었지만, 극좌노선과는 거리를 두었던 몽양 역시 미소공위를 통한 정부수립만이 한반도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좌우가 힘을 합쳐 미소공위의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좌우합작운동은 이처럼 우익진영에 속했지만 극우세력과는 차별성을 보인 우사와, 좌익진영이었지만 극좌적인 노선을 배격한 몽양이 극좌와 극우를 배제한 상태에서 자신들의 노선에 동조하는 중도세력의 규합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탄력을 받았다. 1946년 5월 말에 개시된 이 운동은 7월 10일 합작을 위한 공식기구인 좌우합작위원회(이하 합작위)가 구성되면서 출범했다. 우사와 몽양을 대표로 하여 좌우 각각 5명의 합작위원과 2명의 비서로 합작위가 구성되어 모임을 갖고 의사규정을 비롯하여 합작에 관한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사가 주도한 좌우합작에 몽양이 적극 참여함으로써 합작운동은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지만 합작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었다. 합작위의 정국 주도에 불만과 불안을 느낀 좌우 양 진영의 견제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합작운동에 일차적으로 제동을 건 것은 좌익진영이었다. 모든 사항을 합작위에서 발표하기로 한 규정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합작원칙을 발표하는가 하면, 합작을 중단시키기 위해 몽양에게 테러를 가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합작운동은 파행적, 비공식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동시에 좌익진영 내부의 통합문제가 제기되어 합작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처럼 복잡다단한 정세 가운데서도 우사는 몽양과 함께 합작을 성사시키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고,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1946년 10월 7일에는 양측이 제시한 원칙을 절충한 합작 7원칙에 합의를 보게 되었다. 7원칙의 골자는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적인 임시정부 수립과 미소공위 속개 요청, 토지개혁 실시와 입법기관 설치, 그리고 전국적으로 언론ㆍ집회ㆍ결사ㆍ출판의 자유 보장 등이었다.

이러한 내용의 7원칙은 좌우 어느 한편의 주장에 치우치지 않고 중도적인 입장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최선의 방안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국의 주도권 상실을 우려한 좌우 양 진영의 조직적 반대에 봉착함으로써 7원칙은 현실화될 수 없었다. 좌익진영은 3상회의결정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가 누락되었다고 하여 반대했고, 우익진영의 경우 특히 한민당은 토지개혁 조항이 불합리하다고 하여 거부했기 때문이다.

양 진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사는 꾸준히 합작위의 강화와 7원칙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 확산에 나섰다. 그의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1947년 5월에는 미소공위가 속개되었는데, 이로써 합작의 일차적인 목표는 달성될 수 있었다. 그러나 1947년 7월 19일 우사의 좌익 측 파트너였던 몽양이 피살당함으로써 그가 주도했던 합작운동은 시련에 봉착하게 된다. 우사의 시련은 이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가 기대를 걸었던 미소공위가 미ㆍ소의 견해 차이로 10월에는 완전 결렬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사의 활동공간은 크게 제약을 받았지만,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쳐온 그로서는 미소공위의 결렬로 국토양단과 민족분열이 예견되는 상황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시 행동에 나서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했는데, 바로 이 점에서 우사의 선각자적인 면모가 돋보이는 것이다. 남한의 중도진영이 단결하여 좌우합작을 이루고, 이를 토대로 남북통일을 이룬다는 구상을 결코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합작위를 보다 확대한 차원에서 1947년 12월 민족자주연맹을 조직한 것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 서재필(가운데), 여운형(오른쪽) 등과 함께 차를 탄 김규식 박사


우사가 조직한 민련은 정책 2항에서 남북을 통일한 중앙정부의 조속한 수립을 촉진시키기 위해 남북 정치단체대표회의의 개최를 주장한다고 했는데, 이것이 이른바 남북협상의 단초가 되는 조항이었다. 그는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자신의 구상을 유엔위원단과 면담하는 자리에서 제시했으며, 이러한 구상에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적극 동조하고 참여함으로써 역사적인 남북협상이 태동하게 되었다. 백범이 우사와 노선을 같이하기로 함에 따라 남북협상 추진은 더욱 활기를 띠었고, 이에 힘입어 민련은 우사와 백범 두 사람 명의로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남북요인회담 개최를 요망하는 편지를 보내기로 결의했다. 이들의 편지는 유엔위원단의 협조를 얻어 1948년 2월 16일부로 발송되었다.

우사와 백범이 편지를 보낸 지 사흘 후에 유엔 소총회는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 즉 남한 단독선거안을 채택했다. 이에 대해 우사는 남한 선거에는 불참하겠지만 그렇다고 반대하지도 않겠다는 이른바 ‘불참가 불반대’론을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통일을 위한 노력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는데, 그 단적인 증거가 북한이 제안한 정당ㆍ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 참가였다.

북한은 1948년 3월 25일 평양방송을 통해 4월 14일부터 평양에서 연석회의를 개최할 것을 제의했다. 우사와 백범이 제안했던 요인회담 개최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이 없는 데다가 5ㆍ10선거가 임박한 시점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 북한의 제의는 남한의 정치인들을 들러리로 세우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사와 백범은 참여 방침을 밝혔다. 북한의 제의가 미리 준비된 잔치에 참가만 하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자신들이 먼저 회담을 제의한 이상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4월 21일 서울을 출발한 우사는 연석회의에는 참석하지 않는 대신, 김일성 김두봉 등이 참석하는 요인회담을 성사시켰다. 이 자리에서 그는 어떠한 형태의 단독정부도 반대한다면서 통일을 위한 공동대책기관의 수립을 제안했다. 이는 남한 단독정부는 물론 북한의 단독정부도 반대한다는 것으로 통일정부 수립의 당위성과 함께 그에 대한 방법론까지도 역설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우사는 심혈을 기울여 공동성명에 동족상잔의 내전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을 삽입시켰다. 비록 지켜지지는 않았지만 이는 우사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으로 자유와 평화, 그리고 민족에 대한 한없는 애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돌이켜보건대 좌우 양 진영의 합작으로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좌우합작은 중간에 좌초했다고 결론지을 수 있고, 남과 북의 협상으로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목표에서 보면 남북협상 역시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좌와 우, 남과 북의 극단적인 대결상태에 종지부를 찍고 통일독립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민족의 이상과 염원을 온갖 난관을 무릅쓰고 실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민족의 진정한 지도자로서 우사의 면모가 새삼 각광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사에게 그러한 면모가 있었기에 그가 제안한 좌우합작에 몽양이 기꺼이 참여한 것이었고, 그가 주창한 남북협상에 백범이 참여를 마다하지 않은 것이었다. 광복과 건국을 논하면서 우사에 대한 평가를 아무리 높이 한다고 하더라도 지나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김규식 약력


- 1881년 1월 27일 경남 동래 출생

- 1897년 미국 유학

- 1903년 미국 로녹대 졸업. 뒷날 이 학교로부터 독립운동 공로가 인정돼 명예법학박사학위 받음

- 1904∼1912년 경신학교 YMCA 배재전문학교 교사. 새문안교회 장로

- 1913∼1922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총장 학무총장 등 역임. 모스크바 극동 노력자대회 참석

- 1923∼1945년 중국의 몇몇 대학에서 영문학 교수. 임정 부주석. 조선민족혁명당 당수

- 1945년 말∼1946년 초 임정 1진으로 귀국. 남조선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부의장

- 1946년 여름∼1947년 말 좌우합작운동 주도.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 민족자주연맹의장

- 1948년 4∼7월 평양 남북연석회의 참가. 5·10총선 거부. 통일독립촉성회 결성

- 1950년 제2대 총선에 대해 불반대, 불참가 성명

- 1950년 6·25남침전쟁 발발 후 납북. 12월 10일 평북 만포 북한군 병원에서 별세


◆ 1920년 3월 1일 미국 워싱턴에서 3·1절 1주년 기념식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한 임정 구미위원부 간부들. 앞줄 가운데가 이승만 박사, 그 오른쪽이 김규식 박사.


심지연 경남대 교수·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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