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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 김규식은 누구인가?
임시정부서 외교업무 맡아 독립운동
김규식은 1881년 1월 29일(음력 12월 28일) 청풍 김씨 22세손인 인백파 김지성(金智性)과 경주 이씨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한학에 정통했던 그의 부친 김지성은 일본에서 신학문을 익혔으며 개항 이후에는 외무관리로 러시아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동래부의 대외관계 일을 맡아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때 그가 태어난 것이다. 당시 그의 부친은 일본과의 불평등한 교역으로 인해 많은 문제점이 발생하고 있다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유배를 가게 되었다.

부친의 유배로 집안 살림이 극도로 어려워진 상황에서 그는 여섯 살 때 모친을 여의었으며 열한 살 때는 부친마저 여의었다. 고아가 된 그를 고아원으로 데려가 돌봐 준 것은 당시 선교활동을 하던 언더우드 목사였다. 언더우드의 도움으로 그는 관립 영어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며 내외의 문물에 눈을 뜨게 되었고 학교를 졸업하자 서재필이 설립한 독립신문사에 근무하면서 국내외 정세에 대한 안목과 식견을 기르게 되었다.


1897년 그는 보다 넓은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올라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1904년 귀국했다. 귀국 후 경신학교, YMCA, 배재학당 등에서 영어교육과 민족계몽사업에 전력을 다하는 그에게 항상 일제의 감시가 뒤따랐는데, 1910년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후 감시가 더욱 강화되자 망명을 결심하게 된다. 1913년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독립운동 단체에 소속되어 열심히 활약하면서도 한인들이 설립한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1919년 2월 그는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상하이를 출발했다. 파리로 가는 도중 3·1운동 소식을 듣고 감격해 마지않은 그는 파리에 도착하자 한일병합의 부당성을 알리는 탄원서를 작성하여 각국 대표단에 전달하고 일제의 침략야욕을 폭로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비록 독립에 실질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5개월간 고군분투하면서 외국의 유력 인사들에게 한국문제에 대한 관심 제고와 한국독립에 대한 국제적인 공감대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를 외무총장 겸 파리강화회의 대표위원으로 임명하고 신임장을 파리로 보내기도 했다.

파리강화회의가 끝나자 우사(김규식의 호)는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에서 그는 임시정부 대통령인 이승만으로부터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발령받아 구미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국독립을 역설하는 업무에 종사했으며 독립공채를 팔아 상하이에 독립운동자금을 보내는 일을 하다가 상하이로 돌아왔다. 임시정부가 그를 학무국장으로 임명함에 따라 복귀하게 된 것이다.


상하이로 돌아와 임시정부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던 그는 1922년에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 노력자대회에 참석했다. 극동지역 피압박민족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개최된 이 회의에 그는 여운형 등과 함께 참석하여 5인 의장단의 일원으로 선출되어 개회사를 했고 대회가 끝난 후에는 레닌을 면담하기도 했다. 또한 일본의 침략이 중국 대륙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하는 내용의 논문(아시아의 혁명운동과 제국주의)을 영어로 써서 한·중 양국 인민이 연합전선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주장대로 후일 한·중 양국의 인민은 공동으로 반일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1924년 8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그곳에서 개최된 임시정부 강화와 민족의 대동단결을 모색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는 모임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임시정부가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는 시점에서 개최된 이 모임에서 그는 통일전선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견해를 설파했다. 이러한 주장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그는 1932년에는 조선민족혁명당을 발족시켰고 그 해 겨울에는 ‘중·한 민중대동맹’을 결성했다. 이처럼 독립운동에 투신하면서도 그는 톈진, 청두, 쓰촨 등의 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그의 전공인 영문학을 강의하며 제자들을 양성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1943년 그는 조선민족혁명당의 주석 자격으로 임시정부에 참여했고 1944년에는 임정의 부주석으로 취임했다. 부주석 취임 이후 그는 국민당정부와 협의하며 임시정부를 국제적으로 승인받기 위해 노력했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이처럼 전 세계를 누비며 독립운동을 하던 그가 고국에 돌아온 것은 망명 32년 만인 1945년 11월 23일이었다.

귀국 후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추진하며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던 그는 미군정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5·10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다. 정부 수립 후에도 통일운동을 계속하던 우사는 6·25때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해 서울에 은둔하고 있다가 그만 납북되고 말았다. 1950년 9월 18일에 발생한 일이었다. 납북된 후 그에 관한 소식은 정확히 알려진 바 없으나 1950년 11월 하순경 만포진 근처 병원에 입원해 있던 중인 12월 10일 운명한 것으로 후일 발표되었다. 북한은 1970년대 말 우사를 평양 심미리에 있는 애국열사릉에 모셨으며 대한민국광복회는 1991년 11월 21일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 선열제단에 그의 위패를 모셨다.

이와 같은 우사의 독립·통일운동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우사의 비서실장을 역임한 송남헌(2001년 작고)이 중심이 되어 1989년 12월 21일에는 우사연구회를 발족시켰다. 발족 이래 우사연구회는 여러 차례 학술회의를 개최했으며 2000년에는 그간의 연구결과를 종합하여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전 5권)을 펴냈다. 이 책은 2002년 대한민국 학술원의 우수 도서로 선정되어 우사의 업적을 뒤늦게나마 알리는 자료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송남헌 회장이 작고한 이후 우사연구회는 김재철 회장과 장은기 사무국장이 중심이 되어 이끌고 있다. 우사연구회 회원 20여명은 2006년 7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우사가 활동하던 곳을 중심으로 중국 현지를 답사하며 그의 업적을 기렸다.

우사는 가족으로 부인 김순애(1976년 작고) 여사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자녀들은 모두 미국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장남 진동은 하와이에서 살다가 1997년 9월 작고하였으며 장녀 우애 역시 미국에서 살다 2001년 1월 작고했다. 차남 진세는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다. 현재 진동의 아들 건영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으나 진동의 딸인 수옥과 수진은 한국에서 살고 있다.


심지연 경남대 교수·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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