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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엘리트 공장’이 영어로 수업
그랑제콜의 세계화 혁명
폐쇄적이던 그랑제콜 개혁 "국가 인재 양성에서 글러벌 인재 양성으로"
세계화 강조하며 학교 세일즈... 외국학생 유치·아시아 분교 설립에 적극적
피에르 타피 그랑제콜 총장협회 부회장·ESSEC 총장
“그랑제콜 출신, 현장 적응력 뛰어나”
그랑제콜 출신 글로벌 리더
닛산ㆍLVMHㆍ알카텔 등 세계적 기업의 CEO 많아
▲ 프랑스 혁명기념일(7월 14일)의 가두 행진에선 에콜 폴리테크니크 학생들이 맨 앞줄에 서서 행진한다. 나폴레옹 시절, 기술 장교를 우대한다는 뜻으로 생겨난 전통이라고 한다.


1789년 혁명이 휩쓸고 간 뒤, 프랑스는 무너진 나라를 일으켜 세워야 했다. 교원을 양성하고 산업·과학 분야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키워내는 일이 시급했다. 정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나폴레옹이 만든 교육기관이 ‘그랑제콜(Grandes Ecoles)’이다. 이에 따라 1794년 에콜 폴리테크니크(Ecole Polytechnique)와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ENS·고등사범학교)가 설립됐다. 이어 교량(橋梁) 그랑제콜인 에콜 데 퐁(Ecole des ponts), 광산 그랑제콜인 에콜 데 민(Ecole des mines) 등이 속속 생겨났다.

‘대학 위 대학’이라 불리는 그랑제콜은 프랑스에만 있는 학제(學制)다. 철저한 선발과 경쟁체제로 움직이는 ‘테크노크라트 인큐베이터’다. 이름난 그랑제콜에 입학하려면 ‘바칼로레아’(고교 졸업자격시험)에서 고득점을 받고 고등학교에 있는 ‘준비반’(classe preparatoire)에서 2년간 공부를 한 뒤 콩쿠르(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명문 그랑제콜 졸업은 곧 부(富)와 명예를 의미한다. 그랑제콜 학생에게 전통과 애국심만큼 중요한 가치는 없다.

그랑제콜은 이제껏 프랑스 영토 내에서 프랑스 학생만을 대상으로 프랑스의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가르쳐 왔다. 수업은 물론 100% 프랑스어로만 진행됐다. 1968년부터 ‘파리 1대학’ ‘파리 2대학’ 식으로 평준화된 일반 대학보다도 더 프랑스적이고, 더 배타적이었다.

그런데 프랑스 최고의 ‘엘리트 공장’ 그랑제콜이 변화하고 있다. 최근 1~2년 사이 그랑제콜의 세계화를 강조하며 학교 세일즈에 나서고 있다. ‘프랑스의 리더’뿐 아니라 ‘글로벌 리더’를 키워야 한다는 뒤늦은 반성 덕분이다.

▲ 프랑스 상경계 그랑제콜 ESSEC은 1999년 전통적인 개념의 그랑제콜 프로그램을 아예 미국식 MBA 과정으로 변형했다.


외국의 젊은 인재를 유치하기 위해 직접 발로 뛰는가 하면 아시아 국가에 분교까지 세우고 있다. 모국어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프랑스의 엘리트 양성소에서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진행하는 수업이 늘어나고 있다. 어찌 보면 영어수업만으로도 천지개벽이라 할 수 있다. 최근 2~3년 사이 북아프리카 지역이나 인근의 다른 유럽 국가에 국한됐던 그랑제콜의 외국인 학생 분포도 크게 달라졌다. 중국, 베트남, 홍콩 등 아시아에서 온 학생이 계속 증가추세를 보인다. 교육부의 고등교육담당 장 피에르 호로리스키씨는 “3~4년 전부터 ‘그랑제콜 시스템이 아무리 뛰어나도 프랑스 밖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비판이 제기됐다”며 “세계적인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그랑제콜끼리 통합하고 외국 명문대와 파트너십을 맺는 등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 교육부 고등교육과에 따르면 프랑스의 그랑제콜 수는 400여곳. 하지만 프랑스를 움직이는 최고급 인재를 양성한다고 알려진 대표적인 그랑제콜은 20여곳이 채 안된다. 샤르트르, 미셸 푸코, 앙리 베르그송 등이 졸업한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ENS)를 비롯해 이공계로는 에콜 폴리테크니크와 에콜 성트랄 파리(Ecole Centrale Paris), 상경계로는 HEC, ESSEC이 대표적이다. 이 밖에 광산 전문인 에콜 데 민, 통신 전문인 텔레콤 드 파리와 국가지도자를 양성하는 국립행정학교(ENA)나 시앙스 포(Science Po·파리정치대학)가 손꼽힌다.

지난해 영국 타임지가 주관하는 교육평가기관(THES)이 88개국 1300여 교육기관을 대상으로 조사해 세계적인 베스트 학교 200곳을 선정했다. 이 중 상위 50위 안에 든 프랑스 학교는 에콜 폴리테크니크(27위)와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30위) 두 곳뿐이었다. 영국에서 옥스퍼드 대학, 케임브리지 대학 등 18개의 학교가 들어간 것과 대비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프랑스의 그랑제콜들은 “앵글로색슨계 나라들끼리 영어 논문 수로 서열을 정하는 것에 우리는 관심이 없다”는 투로 일관해 왔다. 하지만 갈수록 글로벌화되는 교육시장에서 외톨이가 되면 학교 자체는 물론 국가적으로도 위기라는 인식이 높아지고 있다.

▲ 자크 시라크 대통령을 비롯한 수많은 고위관료와 정치인이 졸업한 국립행정학교(ENA). 이곳의 목표는 `프랑스 관료 양성`에서 `EU국가의 관료 양성`으로 바뀌었다.


지난 200여년 동안 수많은 기업가, 관료를 배출한 에콜 폴리테크니크는 프랑스 사회를 주무르는 최고권력이라 해서 ‘에콜 폴리테크니크 마피아’란 말까지 있다. 프랑스의 통신회사 프랑스 텔레콤과 알카텔, 루이비통과 크리스챤 디올 등을 거느린 세계 최고의 럭셔리 그룹 LVMH, 수에즈(Suez) 그룹, 로케트 회사 아리안 스페이스, 금융 보험회사 악사(AXA), BNP 파리바 그룹 등의 CEO가 모두 이곳을 졸업했다.

지난 1월 23일 프랑스 파리에서 자동차로 30분 정도 달려 팔레조란 도시에 있는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찾았다. 거대한 호수와 숲을 끼고 있는 학교는 대형 과학단지 같았다. 통신회사 ‘탈레스(Thales)’, 식품회사 ‘다농(Danon)’ 등 세계적인 프랑스 기업의 연구센터가 학교 안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조국, 과학, 그리고 영광을 위하여’. 본관에 들어서니 나폴레옹이 정했다는 교훈이 눈에 들어왔다. 복도에 걸린 액자엔 1794년부터 1994년까지 이 학교를 다녔던 대표적 인물 200여명의 모습이 콩코드 여객기, 고속열차(TGV), 항공기 에어버스, 아리안 로켓 등과 함께 그려져 있었다. 에콜 폴리테크니크는 1805년 나폴레옹으로부터 군사학교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군인을 양성한다기보다는 병기(兵器)를 개발하는 인력을 양성한다는 게 설립목적이었다. 지금도 프랑스 혁명기념일이면 샹젤리제 거리에서 펼쳐지는 가두행진에 이곳 학생들이 맨 앞줄에 서서 행진한다. 입학한 뒤 첫해 동안 학생들은 군대에서 텐트생활 등을 하며 군인으로서 훈련을 받는다.

요즘 이 학교의 최대 화두(話頭)도 ‘국제화’다. 이 학교의 해외인재 유치 발굴 담당인 나탈리 브란저 박사는 “2003년부터 3년째 외국인 학생을 한 해에 100명(전체의 20%)씩 유치해 왔다”고 했다. 이 중 30%는 프랑스 학생들처럼 콩쿠르에 합격해 입학했고 나머지는 프랑스나 본국에서 별도의 시험을 통과해 입학했다. 최근 학교는 외국인 인재 유치를 위해 모스크바, 상하이 등 13개 도시에 입학시험을 치를 센터를 마련했다.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3년짜리 정규 엔지니어 양성 과정에 들어간 프랑스 학생들은 3년간 학비를 전액 면제받는다. 뿐만 아니라 한 달에 500~600유로(60만~70만원 선) 정도의 생활비까지 정부가 부담한다. 최근엔 이 같은 장학금 지원책이 외국 학생에게도 일부 적용되기 시작했다. 필립 알퀴에 국제홍보국장은 “능력 있는 외국인 학생이 학비 문제 때문에 우리 학교에 못 들어올 일은 없다”며 “학비는 물론이고 생활비도 기업의 지원을 받거나 다른 프랑스 학생의 생활비에서 일부를 갹출해 지원한다”고 말했다.

정규 엔지니어 양성 과정은 모두 프랑스어로 진행되지만 석사나 박사 과정에선 프랑스어와 영어가 70 대 30 정도로 섞여 쓰인다. 학교 측은 “국제적인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최근 석사나 박사 과정은 물론 교환 학생 과정을 적극 개발해 늘리고 있다”고 했다.

▲ 프랑스 최고 엘리트들이 모인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학생들이 마련한 무도회.
1829년 설립된 에콜 성트랄 파리도 에콜 폴리테크니크와 함께 최고의 이공계 그랑제콜로 손꼽힌다. 에펠탑을 만든 구조공학자 귀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 1889년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자동차를 생산하고 세계 최초로 일반에게 판매했다는 푸조(Peugeot) 등이 이곳 졸업생이다. 기술, 재정, 인력 등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오케스트라 지휘자 같은 제너럴리스트를 양성한다는 게 이 학교의 목적이다. 에콜 성트랄 파리의 다니엘 그림 부총장은 “80여개 외국 대학과 파트너십을 맺고, 양쪽 학교를 오가며 공부할 경우 학점을 인정하고 이중 학위를 주는 프로그램을 대폭 늘렸다”며 “이 프로그램을 밟는 학생이 현재 1200명이 넘고 덕분에 30개가 넘는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 학생들이 와 있다”고 했다.

이 학교는 몇 년 전부터 교수진이 직접 중국에 가서 우수 인재를 뽑아왔다. 이 프로그램이 성공을 거두자 지난해 9월엔 아예 중국 베이징에 분교를 열었다. 그림 부총장은 “중국 칭화대보다 더 높은 경쟁률을 보이며 108명의 학생이 입학해 베이징에서 우리 학교 방식으로 공부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상경계 그랑제콜, 세계화의 선두주자

‘그랑제콜의 세계화’는 사실 상경계로부터 시작됐다. 경영학 석사(MBA) 과정 중 세계 10위 안에 드는 프랑스의 인시아드(INSEAD)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프랑스산(産) 토종 그랑제콜이 아니다. 프랑스에선 인시아드를 오히려 ‘인터내셔널 MBA학교’라고 부른다. 실제 프랑스 상경계 그랑제콜 중 1~2위로 꼽히는 곳은 HEC와 ESSEC이다. 이들 그랑제콜은 수년 전 미국의 MBA(경영학 석사 과정) 과정을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1907년 문을 연 ESSEC에선 현재 전세계 70여개국에서 온 3700여명의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1999년 전통적인 개념의 그랑제콜 프로그램을 아예 미국식 MBA 과정으로 변형했다. 세계적인 럭셔리 브랜드의 강국(强國)답게 ‘럭셔리 브랜드 매니지먼트 전문 마케팅 MBA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외국인이 전체 학생의 90%에 이르는 이 과정은 모두 영어로 진행된다. 경영학 학사 과정의 학생은 3학년이 되면 의무적으로 6~18개월간 교환학생이나 이중학위제를 통해 외국학교에서 공부해야 한다. 매년 교환학생으로 외국에서 오는 학생이 200명에 이른다. ESSEC은 아시아 시장을 적극 공략한다는 뜻에서 2004년 싱가포르에 분교 개념의 ‘아시아 센터’도 만들었다. 현재 35개국에서 50여개의 동문회 모임이 운영되고 있다.

▲ 모국어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프랑스의 `엘리트 공장` 그랑제콜에서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이 늘어나고 있다.


상경계 그랑제콜 중 5~6로 꼽히는 ESC 루앙(ROUEN)은 세계적으로 160개 대학, 90여개의 글로벌 기업과 파트너십을 맺고 있다. 요즘은 10개월간 프랑스에서 영어로 수업하고, 4개월 동안의 인턴십을 미국에서 하는 석사 과정이 인기다. ESC 루앙의 스테픈 머독 국제협력국장은 “외국에선 프랑스의 명문 학교라 하면 ‘소르본 대학’만 떠올린다”면서 “그랑제콜의 경쟁력 있는 수업 방식을 알리고 외국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해 기숙사, 언어 등 제반 사항들에 있어서도 더 변화를 꾀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프랑스 아닌 EU 관료 양성이 목표

프랑스의 그랑제콜은 자국에서 “폐쇄적인 기득권 문화”라면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특히 그 비판이 더 집중되는 학교가 있다. 1945년 드골 장군이 설립한 국립행정학교(ENA)다. 이름난 그랑제콜이나 대학을 졸업한 뒤 입학할 수 있는 대학원 개념의 그랑제콜이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 지스카르 데스탱 전 대통령, 리오넬 조스팽 전 총리 등을 비롯, 많은 고위 관료와 정치인이 이곳을 졸업했다. 1949년 이래 이미 100여개국에서 온 2200여명의 외국인 학생이 이곳을 거쳐갔다. 주로 정부나 세계기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ENA는 2002년 국제행정대학원(IIAP)과 합병한 후, 외국인 학생 유치에 더욱 적극적이다.

원래 ENA에 입학하는 프랑스인에겐 입학과 동시에 공무원 신분이 주어진다. 총 27개월간의 과정 중 첫해엔 외국에 있는 프랑스 대사관이나 프랑스 내의 정부 부처에서 인턴십을 마쳐야 한다.

인턴십 과정은 외국학생을 대상으로 한 18개월짜리 인터내셔널 프로그램에서도 운영된다. ENA는 원래 학위를 수여하지 않는다. 학교를 나오면 곧바로 고위 공직에 임명되기 때문에 굳이 자격증 주듯이 학위를 줄 필요가 없다는 뜻에서다. 하지만 ENA의 인지도를 높이고 졸업생간의 네트워크를 위해 외국인에겐 별도로 학위를 주고 있다.

요즘 ENA의 목표는 프랑스의 관료 양성이 아니라 EU 국가의 관료 양성이다. ENA의 파스칼 바곤느 국제협력국장은 “파리에 있던 학교를 EU의회가 있는 스트라스부르로 옮긴 것도 그 때문”이라면서 “프랑스 외의 다른 유럽 나라에서 온 외국인을 타깃으로 한 세미나도 적극 개발하고 있다”고 했다.

경쟁관계에 있던 그랑제콜들이 국제무대로 뻗어나가기 위해 서로 손을 잡기도 한다.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비롯한 최고의 이공계 그랑제콜 10곳이 모여 만든 ‘파리 테크(Paris Tech)’는 과학과 엔지니어 관련 공동 연구개발도 한다. 또 그랑제콜이 대학과 손을 잡고 인재를 스카우트하기도 한다.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경우, 매년 400명의 학생을 뽑지만 이 중 10명은 일반 대학에서 2~3년간 공부하면서 뛰어난 학업 성과를 보인 학생들 중에서 선발하고 있다. 그랑제콜의 관계자들은 “그랑제콜은 태생적으로 국제화되기 어려운 프랑스적인 시스템이었다”면서도 “현장의 필요에 따라 인재를 양성한다는 기본 취지만 보면 미국의 경영학 석사 과정(MBA)보다 더 앞선 개념”이라고 한다.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필립 알퀴에 국제홍보국장은 “영국의 웨스트포인트를 비롯해 미국의 버지니아 밀리테리 인스티튜트, 벨기에의 에콜 로열 밀리테어 등이 우리 학교 시스템을 모방한 것”이라며 “국제화의 가능성을 인정받은 만큼 이제 프랑스가 아닌 세계 무대에서의 엘리트 양성 학교로 자리잡기 위해 도약해야 할 때”라고 했다.

파리·팔레조·루앙=황성혜 주간조선 기자 (coby0729@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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