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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에 미쳐 사선(死線)을 넘다
탈북자 피아니스트 김철웅씨
영재교육 받은 북한 상류층 출신... 러시아 유학서 재즈음악 접한 후 탈북 결심
▲ 탈북한 피아니스트 김철웅씨는 "재즈에 미쳐서 모든 걸 버리겠다는 각오를 했는데 막상 원하던 것을 얻고 보니 다시 클래식 음악이 더 좋아진다"며 웃었다.


2001년 10월 17일 새벽, 평양 국립교향악단의 피아니스트 김철웅(金哲雄·32)씨는 두만강을 건너 중국 옌볜으로 도망쳤다. 이유는 남들과 달랐다.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재즈 음악을 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달랐다. 처음 만난 사람들은 피아노가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도 몰랐다. 흑룡강성의 벌목장에 가서 두께 2m, 길이 18m 되는 나무들을 운반했다. 빵 두 조각과 죽 한 그릇만 먹고 새벽 5시부터 밤 12시까지 일했다. 피아노만 쳐봤던 곱디고운 손은 막노동하는 사람의 투박한 손으로 바뀌었다.

‘무엇이 아쉬워 이런 고난의 길에 들어선 걸까’ ‘부모님은 어떻게 됐을까’…. 마음만 춥고 시린 게 아니었다. 눈가에 맺힌 눈물은 고드름으로 변할 만큼 추웠다. 죽고 싶었다. 하지만 목숨을 내걸고서라도 연주하고 싶었던 음악들을 떠올리면 그렇게 죽을 순 없었다.

벌목장에서 일한 지 7개월쯤 지났을까. “교회에 가면 피아노가 있다”는 말을 듣고서 교회에 갔다. 피아노는 없었지만 성경공부 하고 밥 먹고 잠 잘 수 있었다. 2002년 6월 한국 선교사들이 참석하는 교회 부흥회에 가게 됐다. 그런데 꿈에 그리던 피아노가 놓여있는 게 아닌가. 김씨는 어느새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날로 교회 피아노 반주자가 돼 중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점점 더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정말 자유롭게 음악을 하려면 한국으로 가야할 것 같았다. 하지만 한국으로 가는 길은 그리 쉽지 않았다. 두 번이나 중국 공안에게 붙잡혔다. 한번은 기차에서 뛰어내려 도망쳤고, 북한으로 호송됐을 땐 감옥에서 지인을 만난 덕에 풀려나 다시 도망칠 수 있었다. 기적 같은 일들이었다. 2003년 봄 결국 그는 한국으로 왔다.

지난 1월 4일 오후 서울여대 대강당에서 만난 김철웅씨는 옷차림이나 말투가 여느 탈북자와 좀 달랐다. 180㎝가 넘는다는 훤칠한 키에 옷차림도 꽤 신경쓴 듯했다.

그는 피아노 건반에 손을 올리자마자 프랑스 팝피아니스트인 리처드 클라이더만의 ‘가을의 속삭임’을 연주했다. 러시아 유학 시절, 그에게 재즈 음악의 충격을 안겨줬고 결국 탈북의 결심까지 하게 한 곡이었다. 그가 편곡했다는 ‘아리랑’을 듣고 싶다고 했더니 그가 사뭇 진지해졌다. 잠시 숨을 몰아쉬더니 그의 손가락이 건반 위를 춤추듯 뛰어다녔다. 시작할 땐 클래식풍이더니 곡 중간엔 민요풍으로 바뀌었다. 조금 후엔 엉덩이까지 들썩거릴 정도로 온 힘을 다해 쾅쾅 피아노를 쳤다.

“북한에선 아이들이 줄넘기할 때 정겹게 ‘아리랑’을 불러요. 남한 노래방에서 젊은이가 이 노래를 부르면 다들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걸요? 유럽에서도 ‘아리랑’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율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우리 음악을 지켜야죠.”

김씨는 “정치도 경제도 할 수 없는 일을 음악은 할 수 있다”며 “동족간에 싸움없이 손 잡고 이 노래를 부르는 날이 오면 좋겠다”고 했다.

김씨는 당 간부였던 아버지와 대학교수였던 어머니 밑에서 풍족하게 살았다. 8세 때부터 평양 음악무용대에서 음악 영재교육을 받았다. 우리나라 초·중·고에 해당하는 과정을 이 대학의 인민반, 예비반, 전문반에서 마쳤다. “1980년대 초 북한에서 예술인이 갑자기 대우를 받기 시작했거든요. 아들을 잘 키우려는 부모님 욕심 때문에 음악을 시작하게 된 거죠.”(웃음)

김씨는 3000 대 1의 경쟁을 뚫고 평양 음악무용대학의 피아노 부문에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1995년엔 러시아 모스크바의 차이코프스키 국립음악원으로 유학갔다. 여기서 그의 인생이 뒤바뀌었다. “리처드 클라이더만의 곡을 들었는데 충격 그 자체였어요. 몸에 전율이 쫘악 흐르더군요. 이런 음악도 있었구나 싶데요.”

알고 싶은 음악, 해보고 싶은 음악에 대한 욕구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북한에선 클래식곡 중에서도 20세기 현대음악은 사상이 자유스럽다는 이유로 금지돼 있다고 한다. 더군다나 ‘자즈’라고 발음한다는 재즈는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사악한 음악’으로 금지돼 있다. “북한에선 바그너의 음악은 나치주의 때문에 안되고 라흐마니노프의 곡은 미국에 망명한 사람의 곡이라 연주할 수 없어요.”

재즈는 음악에 대한 그의 욕구만 건드린 게 아니었다. 김씨가 살아온 30년 안되는 삶 자체를 되짚어보게 만들었다. “내가 아는 것, 내가 누려온 것이 전부가 아니었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됐어요. ‘난 그동안 기계나 다름없는 연주가였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사실 그때까지 김씨는 무엇에 대해 절실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평양시민의 1%만 갈 수 있다는 고려호텔 지하식당에 가서 왕제산 경음악단의 기쁨조 공연도 허구한날 즐기며 지냈고 ‘창광원’이라는 고급 수영장 겸 사우나도 외국인에게만 개방한다는 주말에만 갔었다. 주머니 속엔 늘 달러가 잔뜩 있었다. “잘나가는 친구들과 최진희, 주현미의 트로트와 이용의 ‘잊혀진 계절’ 같은 한국 곡이 담긴 테이프를 얻어서 들었죠. 참, 제가 처음 본 한국 영화가 ‘무릎과 무릎 사이’였는데….”(웃음) 김씨에게 “혹시 북한의 오렌지족 아니었느냐”고 농을 했더니 웃으면서 “네, 조금이요”라며 답했다.

김씨는 러시아 유학을 마치고 1999년 북한으로 돌아와 평양 국립교향악단의 피아니스트로 일했다. 하루는 연습실에서 리처드 클라이더만의 곡을 연주했다. 한데 보위부 지도원에게 발각돼 시말서를 10장이나 써야 했다. “예전엔 김일성 어록을 읽고 자아비판을 하는 것들이 모두 자연스러웠어요. 그런데 러시아 유학을 마친 뒤에 그런 걸 못 참겠더라고요. 여기는 있을 곳이 못되는구나 싶었죠.”

라이브 카페 연주자에서 대학 교수로

그러다가 결국 2년 뒤 탈북한 것이다. 2003년 봄 한국에 온 뒤로 그는 서울 화곡동의 라이브 카페에서 밤새워 연주했고 일원동의 피아노 학원에서 강사로도 일해봤다. 탈북자 중심으로 모인 ‘평양 예술단’을 만들어 전국의 구청과 시청을 다니며 공연하기도 했다.

요즘 그는 서울여대, 이화여대, 명지대, 숙명여대, 포항공대 등 대학교 채플 강의에 초청돼 ‘아리랑’을 연주하고 자신의 경험담을 전한다. 2004년 9월부턴 한세대에서 음대 교수로 일하고 있다. “제가 원래 자유분방한 사람이에요. 누굴 잘 믿지도 않고 종교도 없었고요. 한데 피아노나 음악에 관해서라면 달라져요. 교회는 피아노 치려고 탈북한 제게 피아노를 치도록 해준 곳이었어요.” 마음 둘 곳 없는 그는 종교에 의지한 덕에 남한 생활에 적응을 해가고 있다고 했다.

오는 2월엔 자신의 스토리를 책으로 펴낼 계획이다. “재즈에 미쳐서 모든 걸 버리겠다는 각오를 했는데 막상 절실하게 원하던 걸 얻고 보니 또 달라지네요. 요즘 들어선 다시 클래식 음악이 더 좋아져요.”(웃음)

그는 “어려웠던 시절들을 다 지우고 음악만 좋아하던, 과거의 나를 다시 찾고 싶다”며 “2~3년 후엔 피아노를 메고 산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황성혜 주간조선 기자(coby0729@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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