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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내, 내 남편은 국회의원] 열린우리당 배기선 의원 부인 이경애씨(18)
“한 사람을 위한 프리마돈나로 만족”
"남편은 노래밖에 모르던 내게 인생을 가르쳐 준 사람"... 운명 같은 사랑 영화로도 만들어져
나를 지켜준 신앙 - “믿음이 없었다면 어려운 시절 못견뎠을 것”
▲ 열린우리당 배기선 의원의 부인 이경애씨가 대학생딸 인의씨. 늦둥이 재의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다.
1980년, 이화여대 성악과 4학년생이던 이경애(李京愛·당시 25세)씨는 프리마돈나가 되는 일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 유인물을 뿌리며 구호를 외치는 운동권 여대생들은 낯설기만 했다. 한데 이상했다. 직접 학생운동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어쩐지 이들을 모른 척하고 지나치기 어려웠다. 최루탄 가루를 맞고 졸도하거나 닭장차(경찰버스)에 끌려가는 여대생들을 보면 ‘대체 저들을 저렇게 만드는 힘이 무엇일까’ 싶었다. 그럴 때면 이유없이 눈물부터 쏟아졌다.

그런 그에게 그 해 7월 고등학교 시절의 은사가 “아는 사람이 있는데 좀 숨겨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정확한 이유야 몰랐지만 일단 겁부터 났다. 스타킹이 뜯기면서 경찰에 잡혀가던 여대생들의 얼굴이 떠올라 거절할 수 없었다.

그 청년이 임시로 머물고 있다는 숙소를 찾아갔다. 행여 누가 볼까 하는 불안한 마음에 핑크색 장미꽃 한다발을 사갔다. 초인종을 누르자 겁을 잔뜩 집어먹은 것 같은 초췌한 모습의 남자가 나왔다. 당시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에 연루돼 지명수배를 당했던 배기선(裵基善)씨였다.

고시생으로 위장한 배씨는 이씨의 집 3층 다락방에서 하숙생활을 시작했다. 그날 밤 배씨의 방문을 누가 두드렸다. 나가보니 고량주 한 병과 파전 한 접시를 쟁반에 담아온 이씨였다. 마주치는 술잔의 숫자만큼 이야기 꽃이 펼쳐졌다. 어린 시절의 고향 이야기, 이루고 싶었던 꿈과 희망…. 배씨가 속닥거리듯 말을 하면 고통의 세월이었을 옥살이 경험담도 정겨운 추억의 한 장면으로 바뀌었다. 배씨는 1977년 11월 자신이 다니던 국민대학교 옥상에서 ‘유신정권의 비민주, 반민주를 탄핵한다’는 내용의 유인물을 뿌리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됐었다.

“목숨 걸고 조국을 지키겠다고 정권에 맞서다 잡혀온 사람들이 감옥에 들어가선 돼지고기 한 조각을 놓고 목숨건 듯 싸운다니까” “독방에서 외로움을 달래고 있는데 여치 한 마리가 감옥 창살에 딱 앉는 거예요. 그러더니 탕탕탕~ 세 번 튀어선 내 가슴에 딱 앉더라고.”

두 사람의 대화는 밤마다 이어졌다. 며칠 후 이씨는 음식 대신 쟁반에 촛불, 만년필, 반지를 들고 찾아왔다. 그리고는 “결혼하자”고 했다. 배씨는 그의 손을 잡았다. 촛불이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해주는 듯 일렁거렸다. 1980년 7월 13일이었다.

열린우리당 배기선(55·경기도 부천시 원미을) 의원과 그의 부인 이경애(50)씨가 그렇게 결혼한 지 25년이 흘렀다. 지난 12월 15일 경기도 부천시에 있는 배 의원의 자택을 찾았다. 거실엔 늦둥이 아들 재의(6)의 장난감이 어지럽게 널려있었고 크리스마스 캐럴과 성가곡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뮤지컬 배우와 정치인의 아내

▲ 1988년 이경애씨가 1981년에 이어 두 번째로 뮤티컬 `에비타`의 주역을 맡았을 때.
서울예고와 이화여대 음대를 졸업한 이씨는 옥살이를 하고 도망자 신세로 젊은 시절을 보낸 남편 이상으로 드라마틱한 인생 길을 걸어왔다. 배 의원 부부의 스토리는 ‘서울 에비타’(박철수 감독·이윤택 각본)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에비타’ ‘올리버’ ‘사운드 오브 뮤직’ 등 수많은 뮤지컬 무대의 주연배우로 무대에 섰는가 하면 백수인 남편을 대신해 10년 넘게 밤무대 가수로 노래를 불렀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강단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찬양성가를 부르며 복음을 전하고 있다.

방송생활이야 1993년 MBC FM ‘가요응접실’ 진행을 끝으로 그만뒀지만 요즘도 간혹 무대에 설 일이 생긴다. “제가 부르면 대중가요도 바로 클래식처럼 들린다고들 해요. ‘이렇~게 좋은 날에 주님이 오신다~면’ 이렇게 말이에요.”(웃음) 그는 가수 조관우의 ‘꽃밭에서’의 한 대목을 멋들어지게 부르더니 “ ‘그 님이 오신다~면’ 같은 부분은 ‘주님이 오신다~면’으로 바꿔 부른다”며 웃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현재 교회에서 권사를 맡고 있다.

지난 11월에도 금강산 옥류관에서 열린 금강산관광 7주년 축하연 자리에 참석했다가 뜻하지 않게 노래를 불렀다. 배 의원은 ‘심장에 남는 사람’이란 북한 영화 주제곡을 불렀고 이씨는 북한에서 금지곡인 ‘그리운 금강산’을 불러 화제가 됐다.

“막상 노래를 시작했는데 ‘비로봉 그 봉우리 짓밟힌 자리’ ‘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같은 부분을 어떻게 불러야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문제가 될 것 같은 부분은 즉흥적으로 ‘찾아온 지 7주년~’ 식으로 바꿔 불렀다. 북한 측 인사들은 “수준 높은 사모님이 오셨다”며 농을 했고 참석자들은 “배기선 의원 부인이 금지곡을 해금(解禁)시켰다”며 웃었다.

프리마돈나의 길을 접고 정치인의 아내가 된 심정을 듣고 싶었다. “무대 위에 서는 소프라노 가수는 공주나 다름없어요. 무대, 조명, 옷, 노래 등 모든 게 그 한 사람 중심으로 움직이죠. 자기 자신을 최대한 죽이고 조용히 내조해야 하는 정치인 마누라라는 자리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일이죠.”

무대에 대한 미련은 없을까. 그는 “ ‘나 잘 났네’ 하고 살다가 정치인 부인이 된 뒤 끝없이 수그리면서 180도 다르게 살고 있는데, 다시 무대에 올라 공주가 되라고 하면 정신이 산만해져 어디 살 수 있겠느냐”며 웃었다.

술집 골방이나 노동자 합숙소로 도망 다녀

1980년 7월 다락방에서 결혼서약을 맺은 두 사람은 일주일쯤 지나 야반도주를 감행했다. 신혼생활은 천호동 달동네에 있는 보증금 30만원, 월세 3만원짜리 방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민주연합청년동지회’ 간사로 회원 1500명의 신상명세서를 갖고 있던 남편은 계속 경찰에게 쫓겼다. 검문 당할까 싶어 여관에서도 못 잤고 지인이 운영한다는 뒷골목 술집의 골방이나 어둡고 습한 노동자 합숙소로 도망다녔다. 그러는 사이 이씨의 배는 불러왔다. 임신한 이씨의 입덧은 점점 심해졌고 체포당하는 불안과 공포로 심신이 약해졌다.

집 나간 딸의 소식을 접한 이씨의 친정 식구들은 두 사람에게 “집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잠시 안정을 찾는 듯했다. 하지만 이씨의 친정집에서 자고 있던 어느 날, 꿈결처럼 “배기선 일어낫!”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남편의 손목엔 수갑이 채워져 있었고 신발 신은 사람들이 두 사람이 덮고 있던 이불을 밟고 서 있었다.

남편은 그렇게 끌려갔다. 정치범 면회는 혼인신고가 된 배우자라야 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이씨 아버지는 “절대 빨갱이 놈하곤 혼인신고를 해줄 수 없다”며 노여워했다. 잔뜩 배가 부른 모습으로 교도소장을 찾아가 “배기선씨의 아이가 뱃속에 있다”며 통사정했지만 남편을 만나지 못했다.

첫딸이 태어나기 직전에야 친정 아버지가 혼인신고하는 걸 허락해줬다. 푸른 죄수복을 입은 남편을 만나고 돌아온 지 얼마 안돼 딸을 낳았다. “하나님! 이 아기만큼은 저처럼 이런 피눈물 흘리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빌었다고 한다.

뮤지컬 배우에서 밤무대 가수로

세상이 무심하진 않았다. 1981년 이씨는 뮤지컬 ‘에비타’의 주인공을 뽑는 오디션이 있다기에 도전했다. 그리곤 100명 넘는 경쟁자를 물리치고 뽑혔다. 하지만 뮤지컬 ‘에비타’는 군사독재를 비판적으로 그렸다는 이유로 7회를 끝으로 공연이 금지됐다. 당시 거금인 100만원도 손에 쥐어봤건만 다시 생계가 막막해졌다. 남편을 면회하러 가야겠는데 영치금 낼 돈이 없었다.

“그때 돈을 빌리러 다니면서 세상을 알아버렸어요. 저한테 돈을 빌려줬다는 이유로, 친구가 남편에게 얻어맞았다는 말을 들었어요. 찬물로 샤워하면서 ‘어떤 바람이 몰아쳐봐라, 내가 세상을 이기리라, 난 쓰러지지 않는다’하고 마음을 굳게 먹었어요.”

그 길로 밤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던 조영남씨를 찾아갔다. 홍난파 작곡의 ‘사랑’이란 노래를 불렀더니 업소 사장이 “당장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이후 저녁 9시면 무교동에 있던 ‘티파니’란 레스토랑에 가서 노래를 불렀다. 어려운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자존심만 버리면 됐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전 일할 때마다 ‘얼마를 줄 수 있겠느냐’며 돈을 따졌어요. 저는 예술을 한 게 아니었어요. 여기서 돈을 못 벌면 당장 길거리에 나가 콩나물 장사를 해야한다고 말했죠.”

취객 앞에서 드레스를 입고 ‘선구자’나 ‘그리운 금강산’ 같은 가곡을 밤이면 밤마다 불렀다. 이씨는 “죽고 싶은 마음이었다”며 “그 때의 악몽을 얼마 전까지 꿨다”고 한다.

1983년 남편은 8·15 특사로 출감했다. 다락방에서 둘만의 결혼식을 올린 지 3년 만에 ‘진짜 결혼식’도 올렸다. 시국사범으로 옥살이를 한 남편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포장마차를 운영해 볼까 했는데 개업식 날 아침에 구청 철거반 직원들이 와선 깨부수고 가버렸다. 이씨는 더 많은 날들을 밤무대에 서야 했다.

배 의원은 당시 돈 버는 아내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었을까. “이 사람도 속상했었겠죠. 하지만 전 ‘남편도 잘될 날이 올 것이다’ 하면서 ‘상처주지 말자’고 다짐했어요. 사람마다 주어진 길이 다르고 남편은 그저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라고 여겼어요.”

이씨는 일부러 더 남편을 왕처럼 떠받들었다. 남편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몰래 지갑에 현금을 넣어주고, 무릎 꿇고 앉아서 남편에게 양말을 신겨줬다. 이런 아내를 위해 남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밤마다 아내의 운전기사가 되는 일이었다. 배 의원은 업소 주변에 스텔라 승용차를 주차해놓고 몇 시간씩 기다렸다. 이씨는 “남편을 만나 인생을 배웠다”고 했다. “저는 ‘술집에서 노래 부르는 이경애’가 ‘화려한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이경애’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남편 덕분에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그걸 깨닫게 됐어요.”

정치인 남편

▲ 배기선의원의 가족사진
1985년 배 의원은 미국에서 돌아온 김대중 민추협공동의장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고 1988년 평화민주당 기획조정실에서 일했다. 1995년 14대 때 국회의원(민주당·전국구)을 했지만 1996년 15대 선거에선 낙선했다. 1997년 대선기간엔 국민회의 선거대책본부 전략기획팀장으로 일했고 김대중 대통령 당선 이후인 1998년 한국방송광고공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이씨는 결혼한 지 18년 만에 처음으로 남편이 가져다준 월급을 받았다.

이후 남편은 2000년(새천년민주당), 2004년(열린우리당) 경기 부천원미을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2005년 6월부터 열린우리당 사무총장직을 맡고 있는 그는 새해 초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선거에 출마하라는 권유를 받고 있다.

이씨에게 ‘정치인 배기선’의 스타일에 대해 말을 꺼냈다. 그랬더니 그는 하고 싶은 말을 쏟아냈다. “원래 정치라는 게 ‘나요 나요~’ 하면서 나서기도 하는 것 아닌가요. 다른 정치인들은 가만히 있다가도 카메라가 오면 나서는데 남편은 오히려 옆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자기는 뒤로 물러서요.”

하기야 국회나 당에서 보면 그는 늘 조용히 뒤쪽에 서있는 편이다. 나서서 목소리를 높이는 법도 없다. 지난해 말 국가보안법 폐지안 처리를 놓고 당내에서 불협화음이 일 때 그는 “현재 내용대로 국보법 폐지를 밀어붙이기보다는 한걸음 물러서더라도 내용을 조금 수정해 연내 처리하자”며 일명 ‘중진안’(중진들의 안)을 냈었다. 하지만 역시 목소리 높이며 나서지는 않았다. 요즘도 그는 남북특위위원장으로 남북문제에 관련해서만 정신을 쏟고 있다.

이씨는 1996년 총선에서 낙선한 남편에게 “당신, 차라리 목사를 하세요. 정치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단다. “정치하지 말라는 말은 제가 못하죠. 하지만 이 사람은 품성이 정치에 너무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첫딸 인의(24)씨도 “아빠랑 다니면 ‘어느 교회 목사님이냐’고 물을 때가 많다”며 웃었다. 옆에 있던 이씨가 “목사가 됐어야 어울릴 사람이 정치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요즘 보면 정치권에 오래 몸담아서인지 남편 입에서 고약한 말도 나오고 자상하지 않을 때도 많아요. 그래도 이 사람의 선한 품성 하나는 믿으니까 ‘그래 다 통과다~’ 하면서 봐주죠.” (웃음)

한국예술신학교 뮤지컬학과 교수를 했던 이씨는 요즘도 명지전문대와 한세대 등에서 학생을 가르친다. “빨갱이는 안된다”며 사위를 받아들이지 않던 이씨의 친정 아버지는 1996년 세상을 떠났고 친정 어머니는 지금 배 의원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아버지는 1996년 선거에서 남편이 떨어진 걸 보고 돌아가셨어요. 그래도 ‘저 놈은 결국 잘 될거야’ 하면서, 예전의 노여움을 푸셨죠.”

이씨에게 무슨 마음으로 처음 만나는 남자에게 꽃다발을 줬는지, 어떤 점이 그리 좋았기에 프러포즈를 했는지 물었다. “오페라 ‘카르멘’에서 집시 여인 카르멘이 돈 호세를 유혹하는 마음이랄까? 제가 철 모르는 낭만주의자였죠. 세상만 좋아지면 이 사람과 평생 살아도 좋겠구나 했어요. 그런데 그 세상 좋아지는 데 15년도 더 걸리데요.”(웃음)

이씨의 바람은 소박하다. “예전엔 ‘돈 때문에 노래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요즘엔 ‘선거 때 표를 얻기 위해 찬송가 부르지 않게 해달라’고 빌어요.” 딸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아들과 노래 부르는 그의 모습이 화려한 무대에 선 그 어떤 프리마돈나보다 아름다워보였다.

황성혜 주간조선 기자(coby0729@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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