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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내, 내 남편은 국회의원] 한나라당 전재희 의원의 남편 김형률씨(17)
“힘들수록 강해지는 내 아내는 수퍼우먼”
"한결같은 사랑이 보수적인 나를 변화시켜... 아내를 최고라 생각하며 살지요"
‘헤쳐 모여’ 가족
근무지 달라 이산가족 신세... “씩씩하게 자란 두 자녀가 최고의 지원군”
▲ 1985년 여름에 찍은 가족사진.
‘3급 행정직 최초로 홍일점 합격한 전재희양, 이 영광은 어머니에게…’ ‘가난 속에서도 꿈은 높고 푸른 곳에’.

1973년 초 여성으로선 최초로 행정고시에 합격한 전재희(全在姬·당시 24세)씨에 대한 기사가 여기저기 보도됐다. 4남매의 장녀로서 일 나간 어머니를 대신해 중학생 때부터 어머니 노릇을 했고, 현실에 굴하지 않은 노인의 애환을 그렸기에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유독 좋아하고, 책값이 없어서 책방에서 몇 시간씩 서서 책을 읽었다는 그의 눈물겨운 스토리가 세상에 알려졌다.

대구에 살던 전씨에게 라면 박스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큼 격려 편지가 쇄도했다. 그 중엔 이런 편지도 있었다. “축하합니다. 저는 신사임당의 고향인 강릉 사람입니다. 전재희씨도 신사임당처럼 꼭 훌륭한 사람이 되세요.” 1년 전 기술고시에 합격해 전매청에 근무한다는 김형률(金衡律)이란 사람이 보낸 격려 편지였다.

의례적으로 “고맙다”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그랬더니 “편지 겉봉에 쓴 이름의 한자 률자가 잘못돼 있다”며 “이름을 바로잡아 달라”는 편지가 다시 왔다.

두 사람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몇 달 후 전씨는 “촌닭이 서울에 가게 됐다”며 자신이 연수 받으러 서울에 간다는 소식을 알려왔고 두 사람은 광화문에 있는 태성다방에서 처음 만났다. 그날따라 눈이 펑펑 내렸다.

3년 뒤인 1976년 12월 두 사람은 결혼했다. 그랬는데 신부(新婦)는 “계속 일을 하겠다”고 했다. 김씨는 그때만 해도 여자는 결혼하면 직장을 그만두는 줄로만 알았다. 주변에선 “그래도 여성 1호로 행정고시에 합격한 사람인데 일하겠다는 걸 막지는 말라”고 했다. 김씨도 ‘곧 그만둔다고 하겠지’ 하면서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세월이 흘렀다. 그때 그 신부는 노동부에서 20년 넘게 일해 최초의 여성국장(1992년)이 되더니 경기도 광명시에서 최초의 여성시장(관선시장·1994년), 최초의 여성 민선시장(1995년)을 거쳐 국회의원이 됐다. 지역구 의원만 두 번 하더니 이젠 경기도지사 선거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노력은 사람이, 결정은 하느님이 내린다”

장대비가 내리던 지난 12월 5일 한나라당 전재희(56·경기 광명시) 의원이 살고 있는 광명시의 한 아파트를 찾았다. 남편 김형률(55·전 조달청 차장)씨가 귀가하면서 사갖고 왔다면서 떡과 음료수를 손수 다과상에 차려 내왔다. 그는 지난해 말 조달청 차장직을 끝으로, 32년간의 공직생활을 마치고 은퇴했다. 요즘엔 조달장학회 이사장과 전직 조달청 직원들의 모임(조우회)에서 부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결혼할 때 일을 못하게 했으면 아내가 시장이나 국회의원이 될 일도 없었고 제가 이렇게 ‘정치인의 남편’으로 인터뷰할 일도 없었을 것”이라며 웃었다. 그는 연방 “인터뷰하는 게 영 쑥스럽고 불편하다”고 했다. 경기도지사 선거를 치를 준비가 잘 돼가는 것 같으냐고 물었다. “먼저 당내 경선을 거쳐야겠죠. 저는 잘 몰라요. 이 사람은 원래 노력은 사람이 하고 결과는 하느님이 내린다고 믿어요.” 부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남편과 아내의 세례명은 각각 ‘요셉’과 ‘마리아’다. 집에는 성모 마리아상과 십자가를 모셔놓고 기도하는 방도 따로 마련돼 있다.

김씨는 전 의원이 당선될 것 같으냐는 물음에 “선거는 워낙 변수가 많아서 끝까지 가봐야 알겠더라”고만 했다. “이 사람은 공무원을 25년간 해서 사실 정치보다 행정 쪽이 적성에 맞는 사람이에요. 정치인이 되고 나선 열심히 일해도 시장으로 일할 때처럼 결과물이 나오지 않아서 그런지, 이전처럼 보람을 못 느끼데요.”

선거철을 앞둔 요즘, 전 의원이 지난 3월 행정도시법의 국회 통과에 항의해 국회에서 단식한 것을 놓고 말이 무성하다. “단식한 것은 선거를 앞두고 표심을 노린 속임수였다”며 “이왕 쇼를 부리려면 실신까지 했어야 효과가 컸을 텐데…” 하며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도 있었다. 당시 전 의원은 하루가 다르게 몸무게가 줄었고 왼쪽 뺨엔 마비 증세까지 왔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국회를 찾아와 단식 중인 아내의 손을 잡아줬던 김씨는 “선거에 이용할 생각으로 단식을 했겠느냐”며 답답한 듯 말했다. “그땐 손학규 지사가 재출마할지 안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행정도시 특별법을 반대한 건 지방 발전을 막자는 게 아니었죠. 우리 가족이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살면서 그 병폐를 경험해봤기 때문에 국가적 비효율을 초래할 것이라는 문제점을 제기한 거죠.”

공무원·정치인 아내를 둔 공무원 남편

▲ 한나라당 전재희 의원의 남편 김형률씨는 "서로를 최고로 여기며 살자가 우리 부부의 철학"이라고 말했다.
전재희 의원의 남편이 공무원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남편이 스트레스 좀 받았겠다”고 한다. 전 의원이 워낙 잘 나가는 공무원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남편이 기죽지 않았겠느냐는 말이다. 첫 여성국장, 첫 여성시장, 첫 여성 민선시장 등 전 의원에겐 늘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결혼 초기엔 두 사람이 지나가면 ‘김 과장과 그 부인’이라던 사람들이 얼마 지나니까 ‘전 시장과 그 남편’이라고들 했다.

김씨에게 솔직히 스트레스 좀 받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이 사람이 워낙 저한테 잘해서 스트레스를 받을래야 받을 수가 없었어요. 자기가 시장일 때 부부동반해서 행사장에 참석할 일이 있으면 늘 저를 앞세웠어요. 우리끼리 있을 땐 두말할 것 없이 저를 받들어줬고요.” 그러면서 그는 말 끝에 “나도 뭐 그리 못 나가는 공무원은 아니었고요”라며 웃었다.

1972년 전매청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한 뒤 지난해 9월 조달청 차장으로 은퇴했으니, 그의 말이 맞다. 김씨는 조달청에서 국내외 물품 계약을 맡는 구매국장도 두 번이나 했고 10조~20조원 되는 대형공사를 계약하는 시설국장도 지냈다.

물론 아내로 인해 일하면서 부담감을 느낀 적도 있었단다. 전 의원이 국회의원이 된 뒤부터였다. “둘 다 공무원일 때엔 근무부처가 다르니 만날 일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고 나니까 국정감사 때 제가 국회에 가면 마주치게 되더군요. 게다가 아내가 야당의원이 되니까 정부에 몸담고 있는 저로선 더 조심스러워지데요.”

조달청 소속 공무원으로서 국감장에 참석한 그에게 아내의 동료의원들은 “우리 한나라당 사위가 오셨다”고 반겼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불편하기만 했다. “그래도 천만다행이었죠. 조달청이 아내가 속한 상임위의 감사 대상이 된 적은 없었으니까요.”(웃음)

과장 승진은 남편이 먼저

김씨가 처음 팬레터를 쓸 때부터 아내에게 흑심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처음에 무슨 흑심이 있겠어요? 그냥 격려한 거죠.” 당시 얘기를 쑥스러운 듯 말하던 김씨는 “아내의 순수하고 공손한 첫인상이 오래 마음에 남았었다”고 했다. 문화공보부에서 공무원 일을 시작한 전 의원은 1년 만에 노동청(노동부로 승격되기 전)으로 옮겼다. 당시 김씨는 신탄진에 있는 전매청에서 일하고 있었다.

“우리가 인연이 있는가보다 했어요. 제가 다른 여자를 만나보려고 하면 연락이 뜸하던 이 사람에게서 갑자기 안부전화가 걸려오는 거예요. 그래도 결혼하게 될 줄은 몰랐죠. 워낙 훌륭한 사람인데 나한테까지 (이 사람을 차지할) 차례가 올까, 뭐 그랬죠.”

그렇게 한 해 두 해 흘렀다. 하루는 전 의원의 어머니가 김씨가 일하는 신탄진으로 불쑥 찾아왔다. “아내의 오늘을 있게 한 장모님은 솔직히 아내보다 더 곱고 잘생기셨더라고요.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죠.” 결혼을 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정작 김씨의 어머니가 “며느리감은 의사가 좋다”면서 결혼을 반대했다. “저나 집사람이나 결심을 잘 안해서 그렇지, 한번 하면 변경이 안되는 사람이죠. 가족회의에서 제가 고집을 피우니까 반대하던 어머니도 두 손을 드셨죠.”

1976년 12월 결혼식을 올렸다. 과장 승진은 남편이 더 빨랐다. 1980년 가을, 전남 광주에 있는 연초 제조창에서 근무하던 김씨가 공무국장으로 승진했다. 본부로 치면 사무관에서 과장으로 승진한 셈이었다. “승진이란 걸 우리 둘 다 못 해봤으니 저나 아내나 뛸 듯이 기뻐했죠.” 1987년 전매청이 한국전매공사로 바뀌면서 조달청으로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김씨는 과장직을 14년4개월이나 했다. 그러는 사이에 아내는 노동부 노동보험국에서 먼저 국장이 됐다.

시장 남편, 정치인 남편

▲ 1986년 전매청 간부 회식 자리에 부부 동반으로 참석했을 때.
전재희 의원은 국회 청소부원들 사이에 가장 인기 높은 국회의원으로 통한다. 그는 청소부원의 장갑 낀 손을 덥석덥석 잘 잡아 상대방을 당황스럽게 한다. 전 의원은 1994년 광명시장 때부터 새벽이면 시내 구석구석을 청소하며 주민들을 만나 ‘빗자루 시장’으로 불렸다. “아내는 집이 어려워 중학생 때 행상도 해봤대요. 어렵게 살아봐서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마음이 가나봐요.”

1년 후 아내는 민선시장으로 출마했다. 당시 여성이 시장으로 선출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때였다. “선거 준비를 하면서 새로운 것을 많이 발견했어요. 아내는 기억력이 좋아 사람 이름을 아주 잘 외우데요. 투박하지만 감동을 주는 대중연설도 잘하더라고요.”

지역 구민은 억척스러운 ‘빗자루 시장’에게 손을 들어줬다. 잠시 탄탄대로를 걷는 듯했다. 하지만 도전이 시작됐다. 아내는 번번이 쉬운 길을 놔두고 자갈밭 길을 택했다. 전 의원은 1998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경기 광명을에서 출마해 여당 총재권한 대행이던 조세형 의원에게 1000여표 차로 졌다. 김씨는 “그건 정말 졌지만 이긴 선거였다”며 아내를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전 의원은 2000년에 비례대표 의원이 됐지만 의원직을 버리고 2002년 보궐선거에 출마해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됐다. “건장한 체격의 남자 수행원들이 ‘지옥유세’라고 할 정도였어요. 아내는 보통 부지런하고 억척스러운 게 아니에요. 지금도 이 사람 보좌진은 너무 일을 많이 해서 배겨나지 못하겠다고 한다네요.”(웃음)

김씨는 “아내는 여성으로서 개척자의 길을 걸어오느라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며 “승승장구한 것 같지만 남보다 몇 배로 더 노력했는데도 늘 승진에서 배제되곤 했다”고 했다. 그때 그 힘이 아내를 지금의 강인한 사람으로 성장시킨 것 같다고 했다.

평생 공무원으로만 일한 그에게 비친 정치는 어떨까. “정치는 막연하게 생각해보면 아주 매력적인데 막상 해보면 보람을 찾기 어려운 일 같아요. 정치라는 게 국감장에서 지적하는 걸로 그치는 것 같아 안타깝더군요.”

“조선시대 사람을 바꿔놓은 아내”

전 의원은 “남편이나 아이들이 나를 고3 수험생처럼 뒷바라지해준다”고 한다. 하지만 남편인 김씨 말은 좀 다르다. “말을 그렇게 하는 거죠. 전 그렇게 뒷바라지 해본 적 없어요. 이 사람처럼 남편에게 잘하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전 의원의 시집 식구들은 시조부부터 4대가 모여살 정도로 엄격한 집안이었다. 전 의원의 시어머니는 남자 옷이 걸린 옷걸이에 여자 옷을 덧걸어도 안되고, 빨랫감을 놓아도 남편의 셔츠가 맨 밑에 깔려있으면 슬쩍 집어서 맨 위에 올렸다.

전 의원은 결혼해서 지금껏 1년에 예닐곱 번씩 치르는 제삿상을 손수 준비한다. 광명시장일 때 새벽에 청소하러 나가면서도 남편에게 꿀물 타주는 일은 거르지 않았단다. 전 의원 부부의 철학은 ‘서로를 최고로 여기며 살자’다. 김씨는 “크게 아내를 돕진 못하더라도 이 사람이 하고 싶은 걸 하게끔 내버려둔다”고 했다. 그래서 전 의원은 “남편의 이해심이 최대의 외조(外助)”라고 말했나보다. “전 원래 조선시대 사람처럼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이었는데 세월이 저를 달라지게 하데요. 불평없이 저를 받아들여준 아내 덕분에 혼자 깨우쳤죠.”

전 의원 집에는 방마다 침대는 물론이고 제대로 된 옷장 하나 없었다. 마루엔 소파도 없이 낮은 탁자 한 개만 있었다. 김씨는 “우린 먹고살 만큼 잘산다”며 “가난한 게 아니라 검소할 뿐”이라고 했다. “명예가 있으면 돈을 멀리해야 하고, 돈 있는 사람은 명예를 가지려 하면 안돼요. 신은 공평하시거든요. 이것 저것 다 가지려 하면 국민이 가만히 두고, 하느님이 가만히 두겠나요?”

김씨는 요즘 주말이면 바쁜 아내를 대신해, 지역구에 있는 교회와 성당에 가서 예배와 미사를 드리며 지역구민을 만난다. 전 의원은 요즘도 밤 11시에 귀가해서 EBS 방송의 영어 듣기 프로그램을 청취하며 영어 공부를 한단다. “그저 너무 욕심 부리지 않고 큰 성과를 못 내더라도 올바르고 존경받을 수 있는 정치인이 되면 좋겠어요.”

두 사람은 결혼해서 이제껏 해외여행 한번 같이 가본 적이 없다. 가장 멀리 간 여행이 제주도로 간 신혼여행이었단다. 이제 좀 여유를 찾고 함께 즐길 때도 되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가 웃으며 말했다. “우린 명예를 얻었고 과거보다 잘살아요. 그러면 된 것 아닌가요. 그리고 우린 떨어져 있어도 늘 같이 있다는 느낌이에요. 게다가 요즘엔 통신도 발달해 있고.”(웃음) 동지애처럼 깊고 단단한 부부 사이의 정이 전해왔다.

황성혜 주간조선 기자(coby0729@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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