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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내, 내 남편은 국회의원] 열린우리당 유재건 의원 부인 김성수씨(16)
“내조 비결? 무조건 잘했다 맞장구쳐요”
"정치인 아내 자리는 남편 말대로 3D업종... 용기있고 소신있는 정치인 되도록 늘 기도해"
‘닮은꼴’ 부부
독실한 기독교 신자에 절약정신 투철
▲ 열린우리당 유재건 의원과 그의 부인 김성수씨는 `절약하고나눠주자`가 삶의 철학이다. 김씨가 20년째 입는다는 옷들을 내보였다.
열린우리당 유재건(柳在乾·68·서울 성북 갑) 의원은 당내에서 민주당과의 통합론이 나오면 “우리 마누라는 이미 다 통합했더구먼”이라며 농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유 의원의 부인 김성수(金成洙·60)씨는 전·현직 민주당 의원의 부인들과 자주 만난다.

그는 1996년 남편이 국회의원(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당선된 뒤 기독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의원 부인의 기도 모임에 지금도 나간다. 모여서 찬송가도 부르고 성경 구절도 읽는다. 의리는 남자의 것인 줄 알았는데 여자의 의리가 더 질긴가. 분당(分黨)되면서 남편들은 갈라섰지만 한번 맺은 부인들의 인연은 십 년째 이어지고 있다.

지난 12월 2일 오후 서울 돈암동에 있는 유 의원의 자택을 찾았다. 김씨는 국민회의 시절 만들어진 모임뿐 아니라 열린우리당 의원 부인의 기도 모임에도 참석하느라 바쁘단다. “부인끼리 ‘우리끼리라도 합치죠, 뭐’ 한다니까요.”(웃음)

유 의원은 지인들 사이에서 ‘다림질 하는 남자’로 통한다. 미국 생활을 하면서 몸에 밴 뒤 지금껏 셔츠는 웬만하면 본인이 다린다. 안방 문이 열렸기에 슬쩍 보니 침대 옆에 다림질대가 놓여있었다. “오늘 아침엔 ‘나 출장 가서 셔츠를 며칠 안 다렸더니 어깨 근육이 좀 뻐근하다’면서 ‘다림질할 셔츠 좀 챙겨달라’고 하대요.”

지난 추석 명절 때 일하다가 김씨의 쇄골뼈가 부러졌다. 고희(古稀)를 몇 년 앞둔 남편이 며칠간 설거지와 집안 청소를 대신 했다. “설거지는 방금 했는데도 돌아서면 또 쌓인다면서 ‘집안일이 이래서 해도 티가 안난다고 하는 거구나’ 하대요. 여자들이 대단하다면서.”

“남편은 계파정치에 약해”

정치권에선 어쩌면 내 편, 네 편으로 갈려 선명성 경쟁을 하는 게 더 쉬운지도 모른다. 그런데 유 의원은 다소 선도(鮮度)가 떨어져 보이는 포용과 설득, 대화와 타협이란 단어를 입에 달고다니며 강조해왔다. 당내에서 합리주의자, 온건주의자로 통하는 그는 지난해 ‘안개모’(안정적인 개혁을 위한 의원 모임)를 만들어 회장을 맡고 있다. 지난해 당내 몇몇 의원들이 국가보안법 폐지, 사립학교법 개정 등의 법안을 연내 처리해야한다고 할 때 그는 “항공모함을 움직이듯 신중하게 해야할 일”이라고 했다. 청와대에 대해선 “참여정부가 국민 신뢰를 얻는 데 실패했다”고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 미국서 변호사하던 시절, 한 송년 파티에서.
그러다 보니 생각이 다른 의원들로부터 욕도 먹었다. 부인은 남편이 그저 소신껏 일하길 바란다. “남편이 옳은 것을 옳게 볼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해달라고 늘 기도해요.”

3선 의원인 유 의원은 지금껏 당내 선거에 출마해 당 의장이나 원내대표 같은 자리를 맡아본 적이 없다. 하지만 지도부 총사퇴 등 비상시기엔 어김없이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으로 추대된다. 올해 초 열린우리당 이부영 의장이 상임중앙위원들과 전원 사퇴했을 때도 그랬고 10·26 재보궐 선거 참패 이후 문희상 의장 등 지도부가 총 사퇴했을 때도 그랬다.

유 의원은 당 의장 같은 자리에 관심이 없을지, 궁금했다. “(남편은) 그런 자리에 관심이 있죠. 그런데 정치에 잘 적응이 안되는 것 같아요. 이 사람은 방송 진행자, 서점 대표, 대학 학장 등 주로 추대돼 일해왔잖아요. 그런 게 정치권에선 잘 안통하는 것 같아요.” 김씨는 “정치란 사람을 끌어모아 함께 몰려다닐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남편은 일은 참 열심히 잘 하는데 계파정치 같은 것엔 약하다”고 했다. 30대 때부터 외국에서 20년간 살면서 한국 땅에서 한국 남성으로서 얻어야 할 것을 못 얻은 면도 있다고 했다.

유 의원은 개혁 성향의 젊은 의원들처럼 당성(黨性)을 과시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스타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의원총회장에서 점잖은 말투로 한두 마디 툭 던지듯 발언하면 은근히 박수 소리가 크다. 부인 김씨는 “요즘 (남편이) 지역구에서 칭찬을 부쩍 많이 듣는다”고 자랑했다. “나라 걱정을 하면서 불안해하는 분이 참 많으시데요. 그런 분들은 남편에게 ‘용기 있다’ ‘지금처럼 소신껏 정치해달라’고 해요.”

당내 강경파로부터 “그렇게 보수·안정을 꾀하려면 한나라당에 가시라”는 비난을 듣는 유 의원이지만 상대 당을 향해선 칼날을 세운다. 그는 얼마 전 “(10·26) 재선거 직전까지 국가 정체성 위기를 운운하며 나라를 뒤흔들더니 선거가 끝나니 박근혜 대표가 (TV에 나와) 피아노도 치는 등 (한나라당이) 갑자기 조용해져 헷갈린다”며 야당에 공세를 폈다. 부인 김씨도 정부·여당에 대해 “좌파정권 아니냐”며 불안해하는 노인들을 만나면 “세계적으로 경제 10위권에 든 이 나라를 누가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사는 북한에 바치겠느냐. 절대 그런 걱정은 하지 말라”고 설득하느라 바쁘다.

기독교 단체에서 강연자·학생으로 만나

두 사람은 1966년 10월 한국 기독교연합회(KWCC)가 마련한 한 강연장에서 처음 만났다. 이화여대 화학과 3학년생이던 김씨는 기독교 봉사단체의 학생지도자 자격으로 참석했다. 이날 미국을 6개월간 시찰한 유네스코의 한 청소년·대학생 지도간사가 강연자로 나섰다. 그 강연자가 유 의원이었다.

그리곤 1년이 흘렀다. 국제 야영캠프 봉사활동에 참여했던 학생 대표자들의 모임이 도봉산 자락의 한 다락방에서 열렸다. 거기에 갔더니 1년 전 강연을 했던 그 남자가 있었다. 그 뒤로도 두 사람은 길거리에서 우연히 자주 마주쳤다. “절 보면 매번 자기 중매를 서라는 거예요. 그러면 전 ‘장가간 분 아니신가요?’ 하고 농을 걸었고요.”

김씨에게 유 의원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 같았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그와 달리 유 의원은 6·25 전쟁통에 피란을 갔고 천안에서 서울로 혼자 올라와 중학교에 입학했고 할머니와 어머니를 부양하고 있었다. 중학생 때 신문 배달, 찹쌀떡 장사, 과외를 했고 연세대에 들어가선 가정교사, 사교춤 강사, 영어교과서 번역을 했다고 했다.

두세 번쯤 만났을까. 유 의원이 프로포즈했지만 김씨의 다른 형제들은 결혼을 말렸다. 할머니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나이도 들었고, 돈도 없는 데다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으니 나중에 정치한다고 하면 너 어떻게 할 것이냐고 했다. 하지만 “사람은 참 괜찮은데…” 했던 김씨의 부모가 결국 결혼 승낙을 했다. 만난 지 석 달 만인 1968년 3월 김씨는 서울 명동 YWCA 강당에서 면사포를 썼다. 신부의 아버지가 계셨는데도 파격적으로 신랑·신부가 동시 입장했고 식장 밖으론 눈송이가 사정없이 흩날렸다고 한다.

1년쯤 지나 남편은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 브리갬영대 사회학과에서 석사과정을 밟기 시작했고 몇 달 후 김씨와 딸도 합류했다. 김씨는 다른 유학생 부인처럼 바느질공장에 가지 않고 생화학 연구실에 들어갔다. 처음엔 취직이 안된다기에 자원봉사자로 일했고 얼마쯤 지나자 정식 직원이 됐다. 그 후로도 20년 넘는 미국 생활 중 10년 넘게 김씨는 의과대학이나 연구소의 실험실에서 일을 했다.

한편 사회학 박사과정을 수료한 남편은 진로를 바꿔 법과대학에 진학했다. 1977년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에서 법학 박사가 되고 나선 미 연방정부 지역사회 변호사로, 캘리포니아 동양법률상담소장으로 일했다. 살인 누명을 썼던 재미동포 이철수씨의 구명위원회 위원장과 변호사로 일하는 동안 미국 캘리포니아주 변호사 시험엔 번번이 떨어졌다.

그때만큼 두 사람이 힘들어했던 적도 없고, 그때만큼 두 사람이 마음으로 똘똘 뭉친 때도 없었다. 남편은 시도한 지 7년 만인 1984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고 LA에 법률사무소를 차렸다. 그런데 변호사 자격증도 없이 자원봉사자로 변호할 땐 기운이 펄펄 나 일하던 남편이 정작 진짜 변호사가 된 뒤 일에 대한 만족을 크게 못 느끼는 것 같았다. “돈을 받고 이민자들의 걱정과 하소연을 듣는 게 마음에 안들었던 것 같더라고요. 이 사람이 이걸 하려고 그 고생을 했나 싶기도 했어요.” 수년이 흐른 뒤 김씨는 남편에게 “당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했다.

1990년 1월 유 의원은 재미 한인의 인권 문제에 관한 세미나에서 논문을 발표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철수 구명운동’으로 이름이 한국에도 알려진 뒤였다. 그게 계기가 됐다. 방송국 시사토론 사회를 맡게 됐고 그 다음엔 영풍문고 대표이사 사장, 경원전문대 학장도 맡았다.

“정치하면 거짓말 하게 될까 싫었어”

남편은 어려서부터 떡 장사, 사교춤 강사, 영어원서 번역 등 안해본 일이 없었다. 유학 시절, 미국 백과사전도 팔았고 도서관에서도 일했다. 그래도 정치는 안할 줄 알았다. 한데 1995년 봄부터 조짐이 이상했다. 남편은 결국 “정치를 해보고 싶다”고 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했지만 돈도 없고 정치기술도 없는 남편이 정치한다는 걸 찬성할 수가 없었다. 당시 김상현, 신기하, 김원길 의원과 그의 부인들이 모여 김씨를 불러내 설득에 나섰다. “전 남편이 정치하는 게 싫은 세 가지 이유를 댔어요. (정치하면) 교회 못갈 것이고 술을 많이 마실 것이고 거짓말을 많이 하게 될 테니 싫다고 했어요.”

▲ 지난 여름 미국서 온 손녀들과 함께.
1995년 여름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 집에 초대를 받아 “남편에게 전국구로 당선될 번호를 주겠다”는 말을 듣고 왔다. “솔직히 정치를 해도 국민회의에서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마음이 조금씩 달라지데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야당이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겠나, 우린 그 혜택을 누린 사람들이니 그 빚 갚는 마음으로 살자고 했어요.”

그런데 상황은 또 달라졌다. 전국구로 출마할 줄 알았던 남편은 당시 국민회의로 옮기지 않고 민주당에 남은 이철 의원과 맞서기 위해 지역구 후보로 출마하게 됐다. 주위에선 “ ‘천국구’ 당선이 될 줄 알았는데 ‘지옥구’로 나가게 됐다” “국제신사 한 명이 정치판에 와서 망가진다”고들 했다.

“우리 부부는 이번에 당선되면 앞으로도 정치하라는 뜻으로 알고, 떨어지면 정치 쪽으론 발도 디디지 말자고 했어요.”

선거 땐 친척을 포함해 열댓 명이 합숙훈련하듯 지냈다. 새벽 예배로 하루를 시작해 지역구 각지로 흩어져 명함을 뿌리고 다녔다. “남편은 ‘하루에 5000명씩 악수를 하겠다’며 새벽부터 약수터와 시장을 훑었어요. 저는 원래 악발이가 못 돼요. 그런데 어렵게 살아온 덕인지 이 사람은 끈기가 정말 대단하더라고요.”

남편은 1996년 4월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후 새천년민주당(2000년), 열린우리당(2004년) 소속으로 두 번 더 국회의원이 됐다. 세월 속에서 그는 정치인의 아내로서 변화를 읽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기 전보다 총재로 계실 때 당내 사람들끼리 더 끈끈하고 정겨웠던 것 같아요. 지금 열린우리당 분위기는 그때와 또 다른 것 같고요. 과거처럼 끈끈한 인정은 없어진 것 같은데 우리 남편만 그런지는 몰라도, 끼리끼리 모여 술 마시며 하는 계파정치는 사라진 것 같아요.”

그는 “정치에는 여야가 있고 소속 당에 대한 사명감도 필요하겠지만 자기 당의 거수기 노릇을 할 바에야 국회의원이 여러 명 있을 필요가 있겠느냐”고 했다. “나보다, 당(黨)보다, 우리나라를 우선시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상대방 당에서 하는 일이라도 옳으면 옳다고 말해주는 포용력도 갖고 있어야하고요.” 부창부수인가보다.

유 의원은 ‘정치인의 아내’란 직업을 “어렵고(Difficult) 더럽고(Dirty) 위험한(Dangerous) 3D 업종”이라고 한다. 하지만 정작 부인 김씨는 내공이 쌓인 덕인지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선거법이 바뀌어 너무 좋아졌어요. 돈도 마음대로 못 쓰고 활동하는 데 제약도 많아졌잖아요. 지역구에서 행사가 열려도 저를 잘 안부르시데요.”(웃음)

그래도 ‘정치인의 아내’가 된 뒤 조심스러운 것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친구 관계도 옛날 같지 않은 것 같아요. 저나 제 남편을 보는 눈이 달라진 걸 느껴요.”

사람 모인 자리에서 몇 마디 거들면 “정치인 부인이라 나선다”고들 하고 가만히 앉아있으면 “정치인 부인이 되더니 도도해졌다”는 말을 듣는다. 동창들 부부 동반 모임에 갔다가 화제가 정치 얘기로 흐르면 얼굴 붉힐 일도 생긴다. 그러면 유 의원은 “우리 좋은 얼굴로 만나자는 건데 정치 얘기 그만하자”고 한단다.

한국에서 태어난 첫째 딸과 미국에서 태어난 두 아들은 모두 결혼해서 영국과 미국에서 살고 있다. 김씨는 “남편이 출장가 있을 때가 내가 친구들과 놀러다닐 수 있는 때”라며 “이 사람이 서울에 있으면 ‘아무도 없고 우리 둘뿐인데’ 싶은 마음에 어디 자리를 못 비우겠다”고 했다. 김씨에게 정치 얘기를 두 사람이 자주 하느냐고 물었다. “남편은 밖에서 속상한 게 있으면 다 말씀해요. 그러면 저는 무조건 ‘당신, 잘했다’고 해요. 제가 하는 게 뭐 있나요. 남편이랑 같이 흥분하고, 같이 욕하고 뭐 그러는 거죠.”(웃음)

거칠고 험한 정치권에 어울리지 않는 유 의원의 넉넉한 품과 여유있는 웃음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 것 같았다.

황성혜 주간조선 기자(coby0729@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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