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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내, 내 남편은 국회의원] 한나라당 김용갑 의원의 부인 김하야씨⑮
“남편의 8년 정성이 나를 일으켰어요”
뇌졸중으로 생사고비 헤맬 때 손발 노릇하며 살아갈 용기를 줘...
"죽도록 고생했어도 지역구 돌며 선거운동하던 때가 가장 좋아"
▲ 김하야씨는 "이 양반이 밖에선 욕을 듣는지 몰라도 내겐 하나뿐인 자상한 남편"이라고 말했다.
지난 3월 2일 국회 본회의장, 한나라당 김용갑(金容甲·69·경남 밀양·창녕) 의원이 마이크를 잡았다. “일부 여성이 호주제 폐지만이 능사인 양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속으로 (호주제 폐지에) 반대하면서 표를 의식해 호주제 폐지에 찬성하는 못난 남성 의원들은 부끄럽지 않나요. 그럴 바엔 불편한 것 달지 말고 떼어버리십시오.”

장내가 웅성거렸다. 호주제 폐지에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온 여성 의원들은 기가 막힌 듯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국회 방청석에선 “자기야말로 지역구민 표를 의식하는 것 아니냐” “국보법 사수나 하실 일이지, 왜 호주제까지 간섭하는 거냐”는 말이 나왔다. 한 여성 보좌관은 “(김 의원은) 딸이 없을 것 같다” “자기 부인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라고 했다.

김 의원은 아들만 세 명이다. 물론 부인도 있다. 7년9개월 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지금껏 일주일에 세 번씩 치료를 받고 있는 김하야(金夏野·65)씨다.

1998년 2월 20일 새벽 4시경이었다. 김 의원이 이상한 신음 소리에 잠에서 깨보니 부인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부축해 일으켜 세우려했지만 아내는 고목이 쓰러지듯 앞으로 고꾸라졌다.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수영과 조깅으로 체력을 단련했고 지역구에 가면 악착같이 인사를 하고 다니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아내가 “여보, 당신 이름이 뭐지?”라고 물으면 “김용갑”이라고 엉뚱하게 남편 이름을 댔고 주소와 전화번호, 어느 것 하나 기억하지 못했다.

집안엔 웃음이 사라졌다. 김 의원과 세 아들은 김씨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하면서 애국가를 끝도 없이 불렀고 돌아가면서 ‘사과’ ‘오이’ 단어를 하나씩 가르쳤다. 김 의원은 난생 처음 부인의 몸을 씻겨줬고 화장도 해줬다. 그렇게 8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선거 땐 휠체어 타고 지역구민 만나

지난 11월 25일 서울 반포동에 있는 김 의원의 자택을 찾았다. 김씨는 외출복을 차려입고 엷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 “내가 추하게 입으면 ‘김용갑씨 부인이 뒤숭숭하게 입고 있더라’는 말을 들을까봐서….”

김 의원은 “집사람은 내 통역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김씨는 남들처럼 자유롭지 못할 뿐 의사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표현들을 뺀 말이 담백했다.

오랜 투병생활 끝에 김씨의 건강 상태는 많이 나아졌다. 오른쪽 팔만 가누기 어려울 뿐 정상인에 가깝다. 생사의 고비를 넘긴 그에게 ‘정치인의 아내’ 역할은 사치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그래도 남편이 16대, 17대 국회의원 선거를 치를 땐 휠체어를 타고 지역구민들의 손을 잡았다.

“내가 (정치인 아내로서) 막 재미 붙이려는데 이렇게 됐어. 지역구 분들에게 할 말이 없어. 너무 죄송해. (지역구에) 잘 내려가지도 않아.” 김씨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김 의원이 무소속으로 나가 경남 밀양에서 15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때가 1996년이었고 김씨가 쓰러진 때가 2년 뒤인 1998년이었다. “내가 이렇게 되고 나니까 처음엔 부끄럽고 남편이고 뭐고 다 싫어졌어.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었고. 그런데 저 양반이 용기를 줬어.”

평생 아내의 뒷바라지만 받아오던 남편은, 아내가 쓰러지자 180도 달라졌다. 손톱, 발톱을 깎아주고 목욕을 정성껏 시켜줬다. 요즘도 밖에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집에 들어오면 “아이고, 안녕하셨어요?” 하며 웃는 낯으로 아내에게 인사를 한단다. 지역구에 가서 어쩔 수 없이 외박할 때면 전화를 걸어 “여보, 사랑해요”라면서 곰살맞게 굴기도 한다. “내가 다 쑥스러워.”(웃음)

그런 남편이 호주제 폐지에 맞서 강경 발언을 하는 바람에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김씨는 알까? “그럼, 나는 아직까지 구시대 사람이야. (호주제 폐지를 반대한 것은) 성(姓)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도록 한 게 문제라고 한 건데….” 그는 “사람들이 욕해도 우린 이 양반 편”이라며 “발언하는 걸 들어보면 공감도 간다”고 했다.

‘국보법 사수’가 정치하는 이유인 남편

▲ 1998년 김하야씨가 뇌졸증으로 쓰러지기 전. 그는 골프·수영 실력이 수준급이었다고 한다.
김 의원은 여당 의원들로부터 ‘초강경 원조 보수파’ ‘보수 꼴통의 1인자’ ‘색깔론의 달인’이란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가 지나치다 싶을 만큼 강경 발언을 하면 보수층에서도 “김 의원은 너무 오버한다” “행동을 자제해달라”는 말이 나온다.

육군사관학교, 중앙정보부 등을 거쳐온 김 의원에게 ‘국가보안법 사수’는 정치를 하는 이유 그 자체다. 70세가 가까운 고령에 법사위원도 아닌데 김 의원은 지난해 법사위 회의 때마다 나와서 국보법 폐지안 상정을 온몸으로 막았다. 지난해 9월엔 국회 본회의장에서 “국보법 폐지에 반대한다”는 요지로 5분 발언을 하던 중 감정이 격해져 정신을 잃고 단상에서 쓰러지기도 했다.

그의 부인은 어떨까. “난 별로 관심은 없어. 그래도 이해는 하지. 우리가 (북한을) 도와도 주민들은 도움을 잘 못받고 북한 정권 쪽으로만 가는 거래. 인권 문제도 안 다루고 (북한 쪽에 우리 정부가) 끌려다니고 있잖아.” ‘보수 꼴통’이란 단어에 대해서도 김씨는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지 뭘”이라고 했다.

그러더니 “열린우리당 386 의원들이 이 양반을 두려워하고 반대했는데 요샌 ‘인간미 있다’면서 좋아한대”라고 했다. “산자위 의원들이 ‘우리 위원장님, 한번씩 그런 이상한 말만 안하면 좋은데’ 하고 웃는다던데.”(웃음) 김 의원이 “보수주의자의 개혁을 보여주겠다”며 상임위원장석의 책상과 의자를 일반 의원들과 같은 크기로 바꾸고 의사봉을 없앤 얘기가 나오자 그는 환한 얼굴로 “(남편은) 권위의식이 없다”고 했다.

중학교 때부터 50여년 이어진 인연

두 사람은 1953년 경남 밀양의 동명중학교에서 처음 만났다. 햇수로 50년이 넘었다. 당시 김 의원이 집안 사정이 어려워 학업을 중단했다가 복학했더니 신입생 중에 김하야라는 여학생이 있었다. 중학생 김용갑 눈엔 그가 ‘동화 속 공주’ 같았다.

김 의원은 3학년이 되자 일부러 김씨네 집과 2m 마주보고 있는 집에서 하숙을 시작했다. 김씨는 ‘수학박사’로 소문나 있는 ‘용갑이 오빠’의 하숙집에 자주 들러 수학을 배웠다. 이후 김 의원은 국비로 다닐 수 있는 교통고교(현 철도고교) 시험을 치렀다 떨어져 밀양 밀성고에 들어갔고 김씨는 부산으로 유학갔다.

인연이 거기까지인 줄로만 알았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가시밭 길을 걸은 김 의원은 군인이 돼 성공하고 싶었다.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고 끝도 없이 김씨에게 연서(戀書)를 날렸다. 하지만 김씨는 그를 ‘사람 좋은 학교 선배’로만 여겼다. 육사 졸업을 앞두고 김 의원은 김씨 집을 찾아갔다. “꼭 따님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장교로 임관하면 설마 밥이야 굶기겠습니까?”

김 의원은 “그때 이 사람이 미인이었는데 남에게 빼앗길까봐 마음이 급했다”며 웃었다. 김씨는 “우리 아버지가 사주를 잘 봤는데 이 사람이 크게 될 인물이라고 했다”고 맞장구쳤다. 1961년 12월 두 사람은 김씨네 집 마당에 멍석을 펴놓고 혼례를 올렸다. 신랑은 사모관대를 차려입고, 원삼을 입고 족두리를 쓴 신부는 얼굴에 연지곤지를 찍었다.

▲ 김용갑 의원 부부는 세 아들 얘기할 때가 가장 즐겁다. 왼쪽부터 첫째, 셋째, 둘째 아들 식구들.


신혼 살림은 당시 소위로 있던 김 의원의 임지(任地)인 강원도 화천군 산골에 차렸다. 1966년 말 김 의원은 둘째 아들을 낳고 산후조리도 제대로 못한 아내를 뒤로 한 채 베트남으로 1년간 파병가 있기도 했다.

이후 1971년 남편은 중앙정보부에 들어가 수송, 정보, 인사, 해외 담당 등을 거쳤다. 국가안전기획부로 이름이 바뀐 뒤 1980년엔 감찰실 실장, 기획조정실 실장(차관급)을 지냈고 1986년엔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 1988년엔 총무처 장관이 됐다. “그런 자리가 높은지 아닌지 난 몰랐어. 장관이 되고 나서도 그냥 나랏일을 하는구나 했어.”

국회의원 당선, “말할 수 없이 기뻤어”

김 의원은 1992년 서울 서초구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떨어졌다. 정계입문한다고 할 때도 말렸지만 김씨는 너무 속상했다. “살맛 없었어. 또 나가면 난 같이 안 산다고 했어.” 남편이 장관이나 청와대 수석까지 해봤지만 국회의원 선거에서 막상 떨어지고 나니 속상했단다.

그런데 남편은 4년 후 또 나섰다. 말려도 그 뜻을 꺾지 못했다. “그때 고향에 가서 택시를 탔다가 ‘내년 선거에서 누가 유리하겠느냐’고 물어봤지. 그랬더니 ‘김용갑 같은 사람이 왜 지금에야 밀양에 내려왔는지 모르겠다’며 ‘그런 사람이 돼야 한다’고 했어. 기분이 좋아서 거스름돈을 안받고 내렸어.”

그래도 막막했다.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차 있는 걸 보니 ‘이 많은 곳들을 어찌 (선거운동하며) 다닐까’ 싶었다. 그래도 선거 당시를 되돌아보면 좋은가보다. “(선거 운동할 때) 자기는 덤벙덤벙하고 지나가. 그리고 나면 내가 지역을 한 곳씩 다지듯이 훑었어. 고생이야 말할 수 없었지. 난 남자같이 (많이) 일했어. 그래도 즐거웠어.”

개표 발표 때 김 의원 가족은 부곡 온천에 가 있었다. 온천엔 갔는데 결과가 신경쓰여서 옷을 입었다 벗었다만 했다. “이 양반이 ‘난 죽도록 했는데 이번에도 (국회의원) 안되겠는가봐’ 했어.” 몇 시간 후 지역구 선거운동원이 전화로 당선 확정 사실을 알려줬다. “말할 수 없이 좋았어.”

이후 본격적으로 ‘정치인 아내’의 길에 들어섰다. 남편 선거만 도우면 되는 게 아니었다. 1997년 대선 때 그는 “이회창 후보를 찍어달라”며 밀양과 창녕 곳곳을 발이 부르트도록 다녔다.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이틀 전에도 그는 밀양시 지구당 개편대회에 참석하러 남편과 내려갔었다.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졌지만 도와준 지역구민을 만나 “고맙다”며 인사를 해야했다. 바삐 돌아다닌 뒤 잠자리에 들 무렵 몸이 왠지 말을 안 듣는 것 같았고, 이틀 후 새벽 쓰러졌던 것이다.

쓰러질 때만 해도 그는 6공 초대 장관들의 부인 모임인 ‘6초회’ 총무였다. 하지만 쓰러진 뒤로 연락도 못하고 지낸다. 국회의원 부인들 모임에도 못 나간다. 김씨는 ‘정치인의 아내’ 얘기가 나오면 “죄송스럽다”는 말을 반복했다. 옆에 있던 김 의원은 정색을 하고 “내조가 별다른 게 있겠느냐”며 “이 사람은 내가 고민할 때마다 용기를 주고 힘을 실어줬던 사람”이라고 했다.

“집에선 더없이 자상한 남편”

▲ 신혼시절, 제주도 용두암에서.
김씨가 남편에게 크게 실망하고 화낸 적이 두어 번 있다. 한번은 김 의원이 1989년 “노태우 대통령은 중간평가 공약을 이행하고 이를 좌경세력 척결의 기회로 삼으라”며 총무처 장관직을 사퇴했을 때였고 또 한번은 2003년 10월 가족에게 말도 없이 현지조사를 한다며 이라크에 갔을 때다. 두 번 다 자기에게 한마디 상의가 없었다. “다른 남자들은 자신과 가족을 생각하는데 이 사람은 그런 생각이 전혀 없었어. 위험한 곳에 마음대로 혼자 가려면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어.”

깔끔한 스타일 탓인지 김씨는 “이 사람이 세수하거나 칫솔질 할 때 물 튀기고 구겨진 셔츠 차림으로 다니는 게 너무 너무 싫다”고도 했다.

남편 흉을 봤지만 그는 “결혼을 정말 잘한 것 같다”고 했다. “남자라고 다 남자가 아니야. 나도 아들이 세 명 있지만 애들 아빠 같은 남자는 그 중에도 없어. 다른 남자들을 봐도 그래. 내가 아파서 이런 얘기하는 게 아니야.”

밖에선 어떤 이미지일지언정 김 의원은 가족에게 더 할 수 없이 자상하단다. 아들들이 간혹 “아버지, 그 얘기는 좀 심했던 것 같다”고 하면 “그래, 그런 부분은 다시 고려해볼게”라고 답한단다. 며느리들도 “우리 시아버지 같은 분이 없다”고 한다.

세 아들은 어엿한 사회인이 돼 큰 아들은 서울대학교와 미국 스탠퍼드 대학을 나와 홍익대 교수로 있고 둘째 아들은 중앙대를 나와 삼성생명에 있다. 셋째 아들은 서울대 경제학과와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 와튼 스쿨을 졸업하고 AT커니라는 외국계 컨설팅 회사에서 일한다.

김씨는 동네에서 아파트 꽃밭을 예쁘게 키우기로 소문나 있다. 그는 한 달에 10만~20만원씩 들여 화단을 가꾸고 있다. “들국화, 장미…봄에 피는 꽃, 가을에 피는 꽃 다 좋아. 사람들이 그것 보러 이 앞에 서.”(웃음)

지난 여름 휴가 때 부부동반으로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으로 한 달 가까이 여행을 다녀왔다. “나는 옷 정리 담당이고 저 사람은 내 머리 다듬어주고 휠체어 밀어주는 담당이었지.” 김씨는 “누가 나를 누워서 병치레하고 있는 줄 알면 아니라고 말해달라”고 했다.

김 의원은 다음 번엔 국회의원 선거에 안 나갈 생각이라지만 김씨 마음은 다르다. “나로선 (남편이) 나가는 게 더 좋아. 나랑 매일 붙어있으면 싸우게 되잖아.” 옆에서 “국회의원 그만하고 당신의 손과 발이 되겠다”는 남편에게 그는 “지금처럼 밖에서 자기 일하는 게 날 도와주는 것”이라며 웃었다.

세월이 치료해주지 않는 상처는 없다. “이렇게 더 살아 무엇하느냐”며 비관하던 김씨도 여유와 웃음을 찾았다. 남편이 목욕시켜줄 때 심정이 어땠느냐고 물었다. “이 사람, 좀 와일드해. 내 피부가 약한데 때수건으로 아프게 박박 밀잖아.”(웃음)

그는 어제도 오늘도 쉬지 않고 동네 주변을 걷는다. “이렇게 살아있으니까 유럽 여행도 하잖아. 죽으면 몰라도 살아있는 동안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걸으려고. 작년보다 올해, 올해보다 내년이 나아지면 되는 거야.”

황성혜 주간조선 기자(coby0729@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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