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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내, 내 남편은 국회의원] 열린우리당 이계안 의원의 부인 박명희씨⑫
“일중독 남편에 중독돼서 살아요”
'서울 공주`와 고학생의 만남, 전세 60만원짜리 단칸방서 시작
정치인의 길 한사코 말렸지만 행복하게 일하는 모습 보면 흐뭇
독실한 기독교 신자 부부
믿음으로 만난 사이… 선거 때도 성경모임엔 안 빠져
▲ 열린우리당 이계안 의원의 부인 박명희씨는 대학교 국문학 강사 일을 그만둔 2002년부터 민화를 그리고 있다.
지난 봄 어느 일요일, 이화여대 정문 앞에 있는 케이크집 ‘미고’에 갔다. 20~30대 여성 사이로 저멀리 테이블에 앉아있는 중년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열린우리당 이계안(李啓安·53·서울 동작을) 의원이었다. 그런데 맞은편에 앉은 여성과 손을 잡고 있는 것 같았다.

나이 오십줄에 들어선 정치인이 일요일 점심시간에 대학가 케이크집에서 한 여성과 손을 잡고 있다? 순간 당황했다. 아는 척을 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허이, 황 기자” 하고 이 의원이 먼저 손을 들어 인사했다. 앞자리에 앉아있던 여성은 부인 박명희(朴明姬·53)씨였다. 테이블엔 케이크와 커피, 성경책이 놓여있었다. 두 사람은 이화여대 대학 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왔단다. 분식집 ‘가미’에서 냉면 먹고 이 케이크집에서 커피 마시는 게 두 사람의 일요일 점심코스라고 했다.

지난 11월 4일 서울 흑석동에 있는 이 의원의 자택을 찾아 박명희씨를 만났다. “그때 순간 당황했었다”고 실토했더니 그의 답이 가관이다. “손잡고 있었냐고요? 아이고~, 사실 우리 그때 다투고 있었어요. 어떤 얘기를 놓고 성경의 어떤 구절에 있네 없네 하면서 줄쳐가면서 찾고 있었거든요.”(웃음)

기업인에서 정치인으로

정치에 입문하기 전 이 의원은 재계에서 ‘샐러리맨의 우상’으로 통했다. 1976년 현대중공업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22년 만인 1998년 현대자동차 사장 자리에 올랐고 2년 뒤엔 현대캐피탈 대표이사 회장이 됐다. 초고속 승진의 신화를 계속 세웠었다. 그런 그가 열린우리당에 입당해 총선에 나간다고 하자 유난히 말이 많았다. ‘현대그룹이 이 정권에 특사를 파견했구나’ ‘역시 권력이 돈보다 더 좋은 거구나’ 하며 수군수군댔다.

하지만 30년 넘게 그와 친구처럼 지내온 아내만큼 충격받은 사람은 없었다. “선거가 있기 두 달 전쯤 남편이 불쑥 낮에 전화를 걸어선 ‘여보, 미안해, 나 사표 냈어’라는 거예요.” 귀가 멍멍해졌다. 충격과 배신감뿐이었다. “내 동의없이 시작했으니 잘해보시라면서 전 이민간다고 했어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안된다고 하면서.”

사실 남편이 정치에 관심이 있는 줄이야 연애시절부터 알았다.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성공한 CEO는 있어도 성공한 정치가가 없지 않느냐, 정치도 기업에서 일하듯 성취도 높일 수 있는 줄 아느냐, 그걸 꼭 직접 해봐야 알겠느냐고 했어요.” 하지만 결국 남편은 자기 길을 택했고 국회의원이 됐다. 박씨는 “남편은 이전보다 더 행복해 한다”고 했다. “아직 (정치) 초보자라 뭘 몰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요.”(웃음)

그러고보니 이 의원은 CEO였을 때보다 얼굴빛이 더 좋아보인다. 자기 분야에서 날고 기던 사람도 여의도 정치권에만 오면 맥을 못추는 법인데. 이 의원네 거실엔 경제전문지 ‘포브스’ 표지에 실린 그의 사진이 액자에 담겨있다. 한데 그때가 지금보다 10년은 족히 더 나이들어 보였다. “하고 싶어하는 것을 하니까 젊어지나봐요. 제가 ‘나는 보톡스 주사라도 맞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해요.”(웃음)

박씨는 “남편은 자기영역을 넓히고 싶어하고 예측할 수 없는 걸 즐기고 갈등상황에서 중재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둔다”고 했다. 그렇다면야 정치만큼 자기 적성에 잘 맞는 것도 없긴 하겠다.

남편이 정치하는 게 그렇게 싫었다는 박씨 말을 듣고보니 지난해 봄 열린우리당 의원 부부 30여명이 오페라를 보러 간다기에 취재갔을 때가 떠올랐다. 국회의원 부인 중 한 명이 “저희 남편 좀 예쁘게 잘 봐주세요”라면서 손을 꼭 잡았었다. 그가 박명희씨였다. 아내 마음이란 게 다 그런 건가보다.

‘서울 공주’와 가난한 고학생의 첫 미팅

▲ 1986년 봄, 직원 결혼식에 갔다가 들른 동학사에서.
얼마 전 박씨는 친정 아버지를 저세상으로 떠나보냈다. 문상객을 맞이하는데 남편이 “당신, 이 사람에겐 더 많이 감사해야 해”라며 한 친구를 소개했다. 1971년 이 의원에게 “나 대신 나가라”고 미팅을 권했던 대학친구다. 대학시절 내내 입주 가정교사로 일했던 이 의원은 미팅에 나갈 엄두를 못냈다. 그러다가 친구의 대타(代打)로 난생 처음 미팅을 하게 됐는데 그때 앞자리에 앉았던 파트너가 지금의 아내다.

이 의원은 “시집올 때까지 서울 사대문 안을 벗어난 적 없는 ‘서울 공주’가 가난한 고학생을 만나 공주의 지위를 포기했다”고 한다. 부모님의 연애 스토리를 들은 두 아들은 “내 딸이면 절대 아빠 같은 남자에게 시집 못가게 했을 것”이라면서 “아빠 입장에선 잃을 게 없는 투자였고 엄마 입장에선 위험한 투기였다”면서 놀린다.

연애시절 두 사람은 허구한날 걸었다. 주머니가 얇은 남자를 만난 덕에 박씨는 명동, 종로, 동숭동, 신촌 등지를 마냥 걸었다. 충무로에서 만나 오장동까지 걷다가 냉면 한 그릇 먹는 게 유일한 사치였다. 집에 들어와 “밥 달라”는 딸에게 박씨의 어머니는 “그 계안이인지 뭔지 하는 사람은 밥도 안 사주디?” 하면서 물었다고 한다.

이 의원은 1975년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이듬해 현대중공업에 입사했다. “돈을 모아야 결혼할 수 있다면서 월급을 제게 갖다줬어요. 이게 당첨돼야 집을 살 수 있다면서 매일 주택복권을 사더라고요.” 집안 식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 딸은 내가 결혼시킨다”는 친정 아버지 덕분에 결혼승낙을 얻는 데엔 어려움이 없었다. 최근 장인상을 치르면서 이 의원은 “날 믿어줬고 섭섭한 말 한번도 한 적 없는 고마운 장인 어른”이라며 눈시울을 적셨다.

결혼 날짜와 시각, 결혼 장소는 모두 신부가 결정했다. “돈이 없으니 일단 그냥 살다가 나중에 식을 올리면 어떻겠느냐는 거예요. 기가 막혔죠. 중간고사 기간을 이용해 이화여대 중강당을 무료로 빌렸어요. 점심식사를 대접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오후 3시로 못박아버렸고요.”

가난한 신혼생활, ‘일 중독’ 남편

신혼 살림은 서울 미아리 대지극장 뒤의 전세 60만원짜리 단칸방에서 시작했다. 세탁기는 마당에, 냉장고는 주인집 마루에 놓고 석유풍로 한 개로 밥해먹고 지냈다. 결혼한 지 4년쯤 되어선 은평구 신사동에 20여평짜리 연립주택 한 채를 마련했다. “남편은 저보고 시집 잘왔다고 해요.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 아니냐는 거예요. 하긴 집 평수가 줄어든 적 없었으니 그 말이 맞아요.”

이 의원은 털털하게 웃는 모습만 보면 자상한 이웃 아저씨 같다. 하지만 현대쪽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그는 철저하고 까다롭고 엄격하기로 악명 높았다’고 한다. 오죽하면 ‘계엄사령관’이라 불렸을까.

어쨌든 아내로선 남편이 승승장구하면서 승진하니 좋았을 것 같다. 박씨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입사해서 새벽 6시 넘어 출근하는 적이 없었는데 그러고도 승진 못하면 오히려 ‘인간시대’에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요.”(웃음)

경복고등학교 시절에도 그는 매일 아침 전교생 중 1번 타자로 등교했단다. 대학 때도 그랬고 회사시절에도 그랬다. “남편은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남도 가만히 쉬는 걸 못봐요. 아침에 눈을 뜨고도 왜 침대에 누워있냐고 묻는다니까요.” 수십년간 살면서 가족끼리 해외여행 한번 간 적이 없단다. 어쩌다 간 가족여행도 주로 이 의원의 회사 출장에 이어 붙인 1박2일, 2박3일짜리 국내여행이었다.

이런 ‘일 중독’ 남편이 살면서 가장 힘들어한 때가 1982년부터 3년간 영국에 파견근무 나갔을 때였다. “남편은 변방(邊方)에 있다고 여기고 시간을 아까워하더군요. 옆에서 보니 책을 정말 무섭게 읽더라고요.”

박씨는 “이 사람을 몰아온 건 부정적인 힘이었다”고 한다. “한 학기 등록금을 못 벌면 다음 학기를 못 다니는 형편이었고 가족 모두의 유일한 생산자였어요. 돈에 대한 공포가 있는 사람인데 그 부분이 비뚤어지거나 왜곡되지 않아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 몰라요.” 그는 “남들은 남편을 은수저 물고 태어난 사람으로 본다”며 웃었다. 하긴 그래 보일 수도 있다. 이 의원은 본인과 부인 명의의 예금을 비롯해 주식과 채권 등 지난해 신고한 재산이 87억8743만원이나 된다.

그런데도 남편은 여전히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티를 낸다. 박씨가 집에 굴러다니는 동전을 주우면 남편은 “이런 걸(집안에 돈이 굴러다니는 것을) 본 적이 없어 좋으니 그냥 놔두라”고 한다. “무료급식 봉사를 갔다가 ‘당신 중학생 때 도시락 못 싸갔을 때 어땠었어’라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버럭 화를 내고는 한마디도 안하더라고요.” 말하던 박씨의 눈가가 벌개졌다. “자기가 기분 좋을 땐 ‘어렸을 때 잘 먹었으면 지금 키가 185㎝는 되고도 남았을 텐데’ 하면서 가끔씩 그런다니까요.”

국문학 강사

3년 전부터 박씨는 민화(民畵)를 그리고 있다. 우연히 신문광고를 보고 시작한 게 이렇게 됐다. 분채를 아교와 섞어서 갠 뒤에 칠하다 보면 하루 몇 시간이 후딱 지나간단다. 남편이 이따금씩 “뭐 하느냐”고 하면 그는 “당신 같은 사람이랑 살려면 이렇게 도 닦아야 해”라고 한다.

마루 벽에 걸려 있는 8폭짜리 병풍 속 작품이 좋아보였다. 책과 붓 등을 그린 ‘책거리’였다. “후원회 때 가서 팔아도 되겠다”고 했더니 “그러게 말이에요”라며 웃었다. “예로부터 궁궐 어좌(御座) 뒤에 비치됐다는 일월곤륜도를 그려줄 테니 대통령 선거에 나갈 분들에게 팔아오라고 했더니 전혀 못하네요.”(웃음)

사실 박씨는 이화여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친 국문학자다. 2002년까지만 해도 이화여대 등 대학에서 교양국어를 가르치며 국문학과 강사로 일했다. 다른 국문학자들과 우리나라 최초 야담집 ‘어우야담’을 번역하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이따금씩 꾸는 악몽이 있어요. 아이를 들쳐업고 난간 없는 계단을 끝도 없이 오르는 꿈이에요. 시간강사 자리를 얻어보려고 이력서 들고 여기저기 다니고 그럴 때였지요.”

학교에서 논문을 쓰다가 조금 글발이 오르는 것 같으면 귀가해 아이들을 봐야 했고, 설거지 하고 난 식탁에서 논문을 썼다. ‘남자들은 마누라가 해주는 밥 먹으면서 논문만 잘 쓰면 되는데 나는 뭐하는 건가’ 하는 마음도 들었다고 한다.

1989년 박사학위 논문은 고소설에 나타난 여성중심적 시각을 다룬 것이었다. 이런 아내의 영향 덕분인지 이 의원도 페미니즘 관련 서적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1997년 여성신문사로부터 ‘평등 부부’로 선정되기도 했었다.

정치인의 아내, 정치인의 아들들

▲ 2000년 2월 둘째 아들(오른쪽에서 두 번째) 한빛이의 고등학교 졸업식때. 맨 위쪽이 큰 아들 한길씨다.
두 사람은 어지간해선 정치 얘기를 잘 안 꺼낸다. “하루종일 밖에서 시달린 사람에게 또 정치 얘기를 하게 하나 싶어서요.” 이 의원은 회사 다닐 때도 일절 회사 얘기는 집에 와서 안했다고 한다.

“알게 되면 내 의견이 생길 테고 그러면 충돌할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 아예 개입하지 말자는 거죠. 제가 이래봐도 알고 나서 모르는 척 하는 스타일은 못 되거든요.”

어떻게 하는 게 긴 안목에서 정치인 남편을 돕는 길인지가 요즘 그의 고민이다. 여성 관련 지역행사나 천주교에서 하는 장애인 봉사단체 활동 등만 주로 하는 편이다. “남편도 행사 때만 잠깐 얼굴 비추는 식은 좋아하질 않아요. 솔직히 아직도 제 몸에 안 맞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아요. 그저 지역구민에게 빚진 마음으로 정치인의 아내 역할을 배우고 있는 중이지요.”

두 사람은 두 아들 얘기할 때가 가장 즐겁다. 아빠 선거를 돕는다고 다니던 광고회사를 그만두고 선거본부 홍보팀에서 일했던 큰 아들 한길(27)씨는 이제 다른 광고회사에 취직했다. 선거 때 한 학기를 휴학하고 트럭을 몰며 조명 등을 챙겼던 둘째 아들 한빛(24)씨도 연세대 신학과에 다니고 있다. “그때 참 기뻤어요. 남편도 신이 났는지 ‘야, 우리 팀워크가 이렇게 잘 맞는데 다음에 선거 한번 더 나가자’라며 좋아했어요.”

요즘도 이 의원 부부는 연애시절처럼 한강 시민공원에 나가 많이 걷는다. 박씨는 “기업에서 일할 때도 늘 바빴지만 국회가 일이 더 많은 것 같다”며 “국회의원은 시작과 끝도 없이 무작정 일해야 하는 곳 같다”고 했다.

아내인 박씨의 바람은 한 가지다. “자기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 남편을 보면 저도 마음이 좋아져요. 다만 정치계를 떠날 때 상처 안 받고 잘 떠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황성혜 주간조선 기자(coby0729@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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