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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내, 내 남편은 국회의원] 한나라당 이혜훈 의원 남편 김영세씨⑪
“아내는 부재중…세 아들 키우는 건 내 몫”
교수.남편.아빠.주부...1인 4역 고되고 힘들어도 일하는 아내가 좋아
경제학 박사 부부
틈만 나면 경제문제로 열띤 토론
▲ 김영세 교수는 "이국땅에서 같은 기숙사에 살면서 사랑이 싹텄다"고 말했다.
일요일이었던 지난 10월 30일, 한나라당 이혜훈(李惠薰·41·서울 서초갑) 의원의 집은 아침부터 부산했다. 오전 8시쯤 이 의원은 서둘러 조기축구회 등 지역구 행사에 참석하러 나갔다. 잠시 후 세 아들이 한 명씩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배고프다” “밥 주세요” 하면서 아빠를 흔들어 깨웠다.

하는 수 없었다. 이 의원의 남편인 김영세(金泳世·43) 연세대 교수(경제학과)는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오믈렛과 샌드위치를 만들었더니 세 아들은 뚝딱 먹어치웠다. 오후는 좀 한가하게 보내려나 했더니 가만히 놔두질 않았다. 한강 시민공원에 나가 축구를 하잔다. 어쩌겠나, 따라나설 수밖에. 저녁 무렵이 돼도 아내는 오지 않았다. 저녁은 인근 신세계백화점 지하에 있는 먹자 코너에 가서 해결했다. 속칭 ‘뿅뿅장’이라는 오락실까지 따라갔다. 정치인 아내를 둔 남편, 그는 주말을 이렇게 보낸다.

세 아들 키우는 ‘주부 아빠’

이혜훈 의원은 17대 총선에 나가면서 ‘세 아이의 엄마 이혜훈, 엄마의 마음, 여성의 마음으로 정책을 만듭니다’라는 모토를 내세웠다. 그렇다. 그는 아이가 둘도 아니고 셋이다. 게다가 모두 아들이다. 중학교 2학년, 1학년 그리고 초등학교 2학년이다.

세 아들의 엄마는 이 의원이지만 ‘엄마 역할’은 김 교수가 더 많이 하는 편이다. 사실 이런 생활, 처음은 아니다. 2002년 안식년을 맞아 미국 UCLA 대학에 연수를 갈 때였다.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돕던 아내는 서울에 남았고 그는 아들 셋을 이끌고 비행기에 올랐다. 떠날 땐 “1년쯤이야” 했지만 막상 도착해 생활이 시작되니 몸이 둘이라도 모자랐다. 집 밖에선 교수요, 집 안에선 주부였다.

세 아들에게 아침 밥을 먹이고 7시50분까지 대학교에 가려면 늘 새벽 6시에 일어나야 했다. 한 명씩 학교와 유치원에 실어다줬다. 알파벳 한 자도 모르던 막내 아들이 유치원 선생님에게 한국말로 “화장실 가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유치원에 불려가기도 했다. 아들이 행여 유치원에서 밉보일까 싶은 마음에 일주일에 두 번씩 유치원 보조교사로 자원봉사도 했다. 김치찌개 끓여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나면 밤늦게까지 아이들 숙제를 봐줘야 했다. “말들을 안해 그렇지 다들 절 결손가정의 가장처럼 안쓰러운 얼굴로 쳐다보더라고요.”(웃음)

그래도 그때의 시간만큼 소중한 때가 없었나보다. 10월 31일 연세대 교정에서 만난 김 교수는 “혼자로 갔을 때보다야 연구도 맘껏 못했고 체력도 많이 떨어졌지만 아이들 셋 데리고 혼자 미국가겠다고 한 건 평생 내가 제일 잘한 결정 중 하나”라고 했다.

아내가 국회의원이 되면서 ‘주부 아빠’의 생활도 진화하고 있다. 올해 초 강의 중이었는데 진동 모드로 해둔 휴대폰이 드르륵 울렸다. “아빠, 나 오늘은 피아노 학원 안갈래”. 둘째 아들의 전화였다. “아빠 지금 수업 중이야. 나중에 통화하자. 응?”

이렇게 세 아들은 툭하면 아빠를 찾는다. 학부모 회의가 있으니 참석할 수 있느냐, 교재 살 돈이 없다, 학원 가기 싫다 등등 이유도 갖가지다. 김 교수는 군말 않고 아들들의 요구 사항을 챙기고 대화를 나눈다.

국회의원 한 명이 있기까지 보이지 않는 가족의 희생은 언제 들어봐도 눈물겹다. “이 의원이 많이 고마워하겠다”고 했더니 김 교수는 “그게 집사람이 고마워할 일인가요? 아들 녀석들이 고마워할 일이죠”라고 말했다. 하기야 그렇게 행동하려면 이런 마음 자세가 있어야 가능할 것 같다.

미국 유학시절 선후배로 만나

두 사람은 1988년 미국 UCLA 대학에서 선후배 사이로 처음 만났다. 둘 다 경제학도였다. 연세대 대학원을 마친 김 교수가 1987년 먼저 갔고, 이듬해 서울대 대학원을 마친 이 의원이 이 대학으로 왔다. 1988년 12월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기숙사는 텅 비었고 식당도 문을 닫았다. 자동판매기 음료수까지 떨어졌었다. 차가 없어 시내도 못나가고 난감해하고 있던 이 의원에게 “차 타라”고 한 게 김 교수였다. 그는 몇 안되는 차 가진 한국 유학생이었다.

“그날 특별한 마음으로 태워준 건 아니었는데…. 이 사람 저 사람 막 태워주다가 (아내에게) 흑심이 생긴 건 맞고요.”(웃음) 낯선 이국땅에서 같은 기숙사에서 살면서 사랑이 싹텄다. “동거한 것 아니냐”고 농을 했더니 “한 지붕 아래 산 것도 동거라면 동거 아니겠느냐”며 웃었다. 애인 사이를 공식 선언한 뒤엔 기숙사를 나와서도 50m밖에 안 떨어진 아파트에서 살았다.

“객관적으로 예쁜 얼굴은 아닌지 몰라도 전 아내가 그렇게 예뻐보이더라고요. 남을 배려하는 현모양처 스타일로 보였어요.” 1991년 한국에 잠시 귀국해 결혼식을 올렸다. 김 교수와 이 의원은 1992년, 1993년 줄줄이 UCLA 대학의 경제학 박사가 됐다.

외국서 ‘헤쳐 모여’하며 살 때

▲ 미국 유학 당시 이혜훈 의원(오른쪽)과 김영세 교수.
연애할 때 운전도 잘 해주고 궂은일도 마다않던 사람도 결혼하면 달라진다. 이 의원 부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집안일 하랴, 공부하랴 정신 없었던 이 의원은 김 교수에게 “전구 같은 것은 당신이 바꿔 끼워야 하지 않느냐” “공부만 하지 말고 집안일도 좀 도와달라”며 불평을 했다. 그래도 한 지붕에서 투닥거리며 살 땐 좋았다.

결혼한 지 2년 후부턴 이 가족은 ‘헤쳐 모여’를 반복해야 했다. 1993년 초 여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경제학과 조교수가 된 김 교수는 영국으로 떠났다. 미국 랜드(RAND)연구소 연구위원이 된 이 의원은 미국에 남았다. “모두 다 영국으로 가자고 할 수도 있었죠. 한데 아내가 가정주부로 그냥 지내는 게 저도 싫더라고요. 케임브리지대학이란 직장이 제게 매력적이듯이 아내에게도 랜드연구소가 매력적인 것이고요.”

아이 둘은 일단 아내가 맡았다.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지냈지만 1년간 떨어져 산다는 것도 쉽지 않았다. 1년 후 김 교수는 영국 런던대학 교수로 자리를 옮겼고 이 의원은 영국 레스터대 경제학과 교수가 됐다. 미국, 영국으로 찢어져 있던 가족이 일단 영국에 모인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런던과 레스터는 기차로 몇 시간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일단 가족의 둥지는 레스터에 틀었다. 김 교수는 주말이면 가족을 만나러 왔다.

사실 이 의원은 “과부란 단어만 들어도 눈물이 절로 나왔다”고 할 정도로 이때를 힘겨워 했다. 미국에서야 파출부 아줌마 도움도 받을 수 있었고 지인도 많았지만 영국에선 사정이 달라졌다. 아들 중 하나가 감기에 걸리면 유치원에서 안 받아줘 하는 수 없이 직장에 못나갔고, 감기가 나을 때쯤이면 다른 아들에게 감기가 전염돼 발을 동동 굴렀다.

그때 얘기만 나오면 지금도 김 교수는 꼼짝 못한다. “지금 제가 ‘내가 아이들 학부모 회의까지 다 챙겨야겠느냐’고 불평하면 집사람은 그때 얘기를 꺼내요. 그러면 전 아무 말 못하고 ‘알았어, 잘할게’ 하고 말아요.”(웃음)

하기야 부부가 둘 다 교수이고 둘 다 공부해야 하는데 아이들 양육은 늘 엄마 몫이었으니 공평한 건 아니었다. 이 의원은 그래도 “ ‘엄마 사랑해’ 하는 아이들과 아이들 아플 때 손 잡고 기도해주는 남편이 있어서 버텼다”고 회상한다. “미안한 마음이 지금도 많아요. 둘째 아이를 임신한 집사람이 전치태반이어서 활동하지 말고 누워 있어야 산모와 태아에게 위험하지 않다는 거예요. 아내는 침대에 걸터앉아 논문을 쓰기도 했었어요.”

셋째 아들은 1996년 귀국한 이듬해에 서울서 낳았다. 김 교수는 “첫째와 둘째 아이 낳았을 때 잘못한 산후조리를 이때 잘해서 오히려 막내를 낳은 뒤로 아내가 건강해졌다”며 웃었다.

정치인 아버지와 정치인 아내

▲ 김영세 교수(가운데 안경쓴 이)가 연세대 교정에서 제자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김 교수의 부친은 2002년 작고한 김태호 전 한나라당 의원이다. 내무부 장관을 지낸 4선의원이었다. 때문에 이 의원은 “누구의 며느리로서가 아니라 유권자의 심판 받는 정치인으로 서고 싶다”는 말을 곧잘 해왔다. “세습정치 아니냐”는 일부 비판에는 “시아버님의 선거기획과 홍보 등을 도우며 현실정치를 배워왔다”고도 했다.

이 의원 부부는 1996년 귀국한 뒤부터 시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김 교수는 “아버지는 늘 제게 ‘넌 전형적인 학자’라고 하시면서 ‘정치는 우리 며느리가 잘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김 교수의 다른 형제도 정치에 별 관심이 없었다. 시집 식구들은 이 의원의 정치입문을 강력히 권유했다고 한다.

아버지도 정치를 그렇게 오래했건만 아내가 정치판에 뛰어드니 얘기가 달라졌다. “솔직히 아버지 선거 도울 땐 땡땡이도 치고 대충 했는데 아내가 한다니까 내 일이나 마찬가지더라고요.” 선거를 앞두고 김 교수는 강의 없는 날이면 선거 사무실을 지키며 유세 상황을 점검했다. 선거 전략을 짜고 홍보물 시안을 확인하고 사무실 자금 관리도 챙겼다. 아내가 참석 못할 것 같은 지역행사에 달려가 “이혜훈 남편입니다”라고 외치기도 했다. 아침 저녁으로 아내에게 비타민을 챙겨주고 한약을 달여오기도 했다.

하지만 지역구민을 만나 인사하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저도 어쩔 수 없는 학자 스타일인지 얼굴 팔리는 것도 같고 어색해 혼났어요. 평생 어디가서 90도로 고개 숙여 인사하고 아쉬운 소리 한 적 없었는데 당신 때문에 별일 다해본다고 생색도 많이 냈어요.”

“그래도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보다 선거 치르는 게 재미있지 않으냐”고 물었다. 김 교수는 “뭐 그럭저럭 나름대로~”라며 말을 흐렸다.

아버지도 여러 번 국회의원에 당선됐지만 아내가 당선됐을 땐 정말 기뻤다. 김 교수는 “대선에 관여하면서 아내는 ‘국책연구원에 있으면서 정치 쪽 일을 하는 게 옳지 않다’며 사표를 냈다”며 “안 그런 분도 많던데 아내의 이런 점엔 점수를 주고 싶다”고 했다.

지역구 행사로도 바쁘지만 국정감사 때면 이 의원은 새벽 2시에 귀가하곤 한다. 지방에서 국감이 열리면 외박을 하기도 한다. 김 교수는 “원래 제가 학습이 잘 되어서 문제없다”며 웃는다. 이 의원은 한국개발연구원에 있을 때에도 UN과 OECD 회의 참석차 1년에 네댓 번씩 해외출장을 다녔다. 김 교수는 선거 땐 적극 도왔지만 요즘은 부부동반 아니면 지역구 행사에 따로 가진 않는다고 한다.

“아들 셋과 목욕탕 갈 때가 가장 행복”

▲ 김 교수 부부와 세 아들.
김 교수에게 경제학자와 정치인 중 어느 쪽이 아내에게 더 맞는 것 같으냐고 물었다. “글쎄 좀 어렵네. 정치를 어떤 것으로 규정하는지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요. ‘직업이 정치’였던 과거 스타일의 정치인 개념으로 보면 아니겠지만 자기 전문성을 살려 정치에 적극 참여하는 요즘 정치인 기준으론 잘 하고 있다고 보는데요.”

김 교수는 경제 문제를 놓고 아내와 토론을 벌일 뿐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선 참견을 하지 않는 편이다. “방송 보니까 자꾸 얼굴에 손이 가더라. 그런 점 좀 신경써라”와 같은 조언만 한다. 김 교수는 “경제학 박사인 아내가 막상 정치를 잘할까 걱정스럽기도 했었다”며 “국감장에서 소신을 밝힐 때나 사람들 만나 시장 아주머니처럼 넉살 좋게 인사할 때 보면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김 교수는 요즘 아들 셋을 앞세우고 동네 목욕탕 갈 때가 가장 뿌듯하다. 유난히 병치레가 잦았던 아들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씩씩하게 잘 자라고 있다. 세 아들은 뉴스에 엄마 얼굴이 나오면 “야, 엄마다~” 하고 TV 앞에 몰려들 뿐 ‘국회의원 이혜훈’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다. 학교에 지역구 국회의원 신분으로 엄마가 와서 축사를 해도 “엄마, 오늘 학교 와서 얘기하더라”하고 만다.

“같이 축구하러 가자” “밥 달라”고 보채는 세 아들, 새벽부터 출근해 밤에 귀가하는 국회의원 아내를 뒀지만 김 교수는 행복한가보다. “아내가 원래 비타민 같은 걸 챙겨먹는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그러니 전 아이 셋과 아내 먹이려고 비타민과 물잔 들고 따라다녀요. 그러고 사네요.” 김 교수 얼굴이 연세대 잔디밭에 굴러다니는 단풍잎만큼 발그레해졌다.

황성혜 주간조선 기자(coby0729@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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