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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태영의 글로벌 라운지] 역대 최고의 FRB 의장은 ‘인플레 해결사’볼커
경제학자, 13명 중 `최고` 평가...1980년 최악의 경제 구하며 그린스펀 성공의 발판 마련
미국 FRB는?
달러 통화량·금리수준 결정으로 세계경제 조절
워싱턴포스트 발행인이 된 5대 FRB 의장 메이어
금융정책의 독자성 위해 정권 바귀어도 자리 유지
▲ 폴 볼커 당시 FRB 의장이 1980년 3월 미 상원에서 증언하고 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14대 연방준비제도 이사회(FRB) 의장에 벤 버냉키 백악관 경제정책자문회의 의장을 지명했다. 미국의 중앙은행인 FRB 의장은 ‘경제 대통령’이라는 평을 듣는다. 미국 경제는 세계 경제를 이끌어가는 기관차에 비유된다. 그리고 FRB 의장은 통화량과 금리를 조절함으로써 미국 경제, 나아가서는 세계 경제를 조절한다. 때문에 FRB 의장이 한마디만 하더라도 세계 증권시장은 출렁인다. 그만큼 FRB 의장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현재의 앨런 그린스펀 의장은 미국 역사상 성공적인 FRB 의장으로 평가된다. 그린스펀은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강조한다. 빌 클린턴이나 조지 W 부시 대통령 등이 재선을 앞두고 경기진작을 위해 통화량을 늘려달라고 한 요청도 거부했다. 그러나 “미국 경제가 호황일 때 중앙은행장을 맡아 좋은 평만 받을 수 있었던 행운아”라는 시샘도 따른다.

그렇다면 미국 역사상 지금까지 있었던 13명의 FRB 의장 가운데 가장 훌륭하게 업무를 수행한 사람은 누구일까. 미국 경제학자들은 지미 카터 대통령이 지명했던 폴 볼커를 가장 위대한 FRB 의장으로 지목한다. 그린스펀과는 달리 미국 경제가 최악의 국면에 빠져있을 때 FRB 의장이 돼 인플레를 잡고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기 때문이다. 독일 출신의 미국 경제학자인 헨리 카우프만은 볼커를 “20세기에 전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중앙은행장”이라고까지 극찬했다.

우울했던 카터 시절

지미 카터 대통령 시절이던 1979년 미국 경제는 최악의 상태였다. 이 해 인플레율은 13.3%나 됐다. 베트남전쟁 패배의 후유증이 컸지만 FRB도 인플레보다는 성장에 신경을 썼기 때문이었다. 인플레를 잡기 위해서도 블루멘털 재무장관은 금리인상을 주장했으나 당시의 밀러 FRB 의장은 “통화정책에는 이상이 없다”며 반대했다.

▲ 워싱턴 DC에 위치한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건물.
두 당국자간의 갈등이 심화하면서 1976년 1000을 돌파했던 다우존스 지수는 800선에 머물 정도였다.(다우지수는 요즘에는 1만을 오르내린다.) 카터 행정부 내에서의 통화정책에 대한 갈등은 월가 투자자들의 신뢰를 상실했다. 카터 대통령 스스로도 “정부가 신뢰의 위기(crisis of confidence)를 맞고 있다”고 선언할 정도였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미국이 남미형의 만성 인플레 경제로 추락하거나 아니면 1930년대와 같은 대공황에 빠져들 것”이라고 비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결사로 등장한 인물이 폴 볼커였다. 카터가 볼커를 FRB 의장에 임명한 것은 그가 뉴욕연방은행장을 맡고 있는 데다 보수적이며 월가의 지지를 받고 있는 통화전문가였기 때문이었다.

볼커는 취임식에서 “우리는 심각한 경제적인 난제에 직면해있다. 15년 전 우리는 모든 경제 문제를 해결할 방도를 알고 있다고 믿었지만 이제 그런 환상은 사라지고 말았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임무가 ‘인플레이션 용(inflationary dragon)’을 잡아죽이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인플레가 공적 1호’라고 선언한 셈이었다. 그는 애초부터 긴축정책을 통해 인플레를 잡기로 작정했다. 긴축정책을 쓰면 단기적으로 경제가 하강국면에 돌입해 대중과 정치인이 반발하게 마련이다. 볼커는 이들과의 지루한 갈등을 예감한 듯 취임식 날 기자들과 차를 마시며 “모든 중앙은행장의 임무는 가능한 한 지루해지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볼커의 공격 대상은 당시 미국에 만연한 인플레 기대심리였다. 볼커는 이를 국가적으로 벌어지는 ‘인플레에 대한 투기(national bet on inflation)’이라고 불렀다. 공격수단은 긴축정책이었다.

볼커가 취임한 직후인 1979년 10월 초 미국 경제는 외견상은 좋아보였다. 실업률은 5.8%에 불과했으며 생산자지수도 5년 내 최고 수준인 17%나 됐다. 그러나 과도한 통화공급으로 인플레가 심화하면서 달러화는 약세가 지속됐으며 해외투자자의 미국 경제에 대한 불신도 깊어져갔다.

살인적인 고금리

당연히 볼커 FRB 의장은 통화공급을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은행은 대출을 거의 중단했으며 기업은 신규투자를 중단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10월 6일 토요일 밤에 볼커는 이례적으로 기자회견을 열고 “경제지표는 좋으며 앞으로 더 나아질 수 있다. 하지만 인플레 수치는 나쁘게 나타났으며 앞으로 더 나빠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할인율(중앙은행이 민간은행에 대부해줄 때의 이자율)을 무려 12%로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이를 당시 언론은 ‘토요일 밤의 학살’이라고 불렀다. 민간은행은 연방은행에서 돈을 꾸면 12%의 이자를 감당해야 하므로 기업이나 고객에게는 이보다 훨씬 비싼 이자를 물리게 된다. 일반 은행금리는 무려 20% 가까이 뛰어올랐다. 미국 국채의 수익률은 8%에서 12.5%로 급상승했다.

이러한 고금리정책에 대해 카터 행정부는 몹시 불쾌해 했다. 카터 대통령도 처음에는 국민에게 “신용카드를 이용한 과도한 소비를 억제하라”고 호소하며 인플레 억제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이로 인해 국민 사이에서는 신용카드를 찢어 백악관으로 보내는 등 호응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금리가 유사 이래 최고 수준이라는 평을 받는 20%까지 올라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단기적으로 경기를 악화시켜 유권자의 지지를 잃어버리기 때문이었다. 실업률은 10%로 늘었다. 주식시장도 폭락했다. 집도, 차도 팔리지 않았다. 기업은 유동성 위기에 휘말렸다. 1980년에 접어들면서 금리의 급상승으로 미국 경제는 불황으로 빠져들었다.

정치인·관료의 철저한 불개입

▲ 1980년 11월 대통령 선거 승리를 선언하는 레이건.


그 해 가을 대통령 선거에서 카터는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해 재선에 실패했다. 결정적인 패인 중의 하나가 볼커의 고금리 정책이었음은 물론이다. 카터는 대통령이었지만 볼커의 정책에는 개입하지 않았다. 레이건이 승리하자 볼커는 고금리 정책을 더욱 독하게 추진했다. 1981년 6월에도 금리는 20%까지 올라갔다. 국채 수익률도 17.3%로 상승했다.

그러나 레이건 대통령은 ‘미국 경제가 장기 불황에서 빠져나오려면 인플레를 잡아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레이건의 막료들이 “볼커 FRB 의장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카터처럼 연임에 실패한다”는 경고를 쏟아냈지만 레이건은 “우리가 FRB를 두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반문하며 개입하지 않았다. 그리고 “미국 경제가 제 길을 간다면 나중에는 훨씬 더 건강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볼커는 후에 “백악관과 재무부의 관료들이 나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지만 레이건은 나를 비난하지 않았다”며 “레이건은 인플레를 잡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점만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 미국 최고의 호황기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 클린턴 대통령(왼쪽)과 그린스펀 FRB 의장.
하지만 볼커에 대한 국민의 원성은 커갔다. 벽돌공 노조는 “고금리 정책으로 건설경기가 죽고 일자리가 사라져 더 이상의 벽돌이 필요없다”며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건물 앞에 벽돌을 쌓아올리며 시위를 벌였다. 농민도 연준 건물을 둘러싸고 고금리정책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자동차가 팔리지 않자 자동차 딜러들은 새로 나온 차 키를 관에 담아 볼커에게 보냈다. 집을 사려고 열심히 저축한 사람들도 고금리 때문에 더이상 집 사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볼커 자신도 이러한 편지를 자주 읽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음은 아픈 일이었지만 인플레를 잡지 않고서는 미국 경제는 장래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고금리로 인한 진통은 3년이나 지속됐다.

하지만 1981년 중반에 접어들면서 인플레율은 한 해 전의 14.6%에서 9%로 꺾였다. 1982년에는 인플레율이 4%로 잦아들었다. 학자들은 1982년부터 미국 경제가 힘차게 회복되기 시작했다고 분석한다. 그 해 8월 17일 다우존스는 4.9%나 상승했다. 역사상 기록이었다. 미국 경제는 새롭게 태어났다. 그리고 이때부터 시작된 미국 주식시장의 호황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볼커는 1987년까지 FRB 의장을 지냈다. 그의 후임자 앨런 그린스펀 의장은 볼커가 이루어 놓은 경쟁력 있는 강력한 미국 경제를 안정적으로 이끌어왔다.

우태영 조선일보 출판국 기획위원 (tywo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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