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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내, 내 남편은 국회의원] 한나라당 김문수 의원의 부인 설난영씨⑤
“노동운동으로 쫓기다 결혼 골인… 경찰이 중매한 셈이죠”
1970년대 구로공단 취업 후 20여년 넘게 노동.여성 운동...
전업주부로 이젠 이념보다 남편이 먼저
인생의 아이러니
▲ 지난 7월 러시아 연해주에서.
1981년 9월 26일 서울 봉천동 사거리 밑 봉천중앙교회 교육관. “웨딩드레스가 사치스럽다”고 숙녀복 정장을 고집한 여성, 뿔테 안경을 쓴 깡마른 남성이 팔짱을 끼고 동시입장했다. 세진전자 노조지부장직에서 쫓겨나 노동자로 전자제품 조립을 하던 설난영(薛蘭寧)씨와 숨어서 노동운동을 벌이던 서점주인 김문수(金文洙)씨의 결혼식이었다. 주례는 한달수 당시 금속노조 부위원장이 섰다.

노동운동을 벌이던 동지간의 결합. 이날 결혼식장 근처엔 전경버스 다섯 대가 대기해 있었다. 시위를 열기 위한 ‘위장 결혼식’으로 의심을 받아서였다. 공장 작업장에서 경찰에 쫓겨다니는 것도 모자랐는지 결혼식장에서도 쫓기는 신세가 된 것이다. 사실 이 두 사람의 동지애가 백년가약으로 맺어지는 데엔 경찰이 한몫을 했다. 1980년 말 남자가 경찰의 눈을 피해 여자의 자취방에 피신한 뒤 둘은 훨씬 가까워졌다.

25년이 흘렀다. 이들은 더이상 경찰 눈을 피해 도망다닐 이유가 없어졌다. 세상도 달라졌고 부부의 신분도 달라졌다. “공구를 못다뤄 위장취업하기 어렵다”며 환경관리기사 등 국가기술자격증 8개를 가진 남편은 ‘야당의 저격수’로 손꼽히는 3선 의원이 됐다.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는 덕에 부인은 서점이나 탁아소를 운영하지 않고 내조(內助)만 하며 살게 됐다.

●●남편만큼 피가 뜨거운 부인

지난 9월 9일 한나라당 김문수 의원(경기 부천시 소사구)의 아파트를 찾아갔다. 대학생인 딸 동주씨가 “엄마는 미장원에 가셨다”고 했다. 10분쯤 지나 현관문이 열렸다. “아이구, 인터뷰 시각에 맞춰 오셔야지 이렇게 손님이 먼저 오시면 어떻게 해요?” 설씨는 “머리 손질이 늦어져 (미장원 다녀온 게) 탄로났다”며 웃었다. 젊은 시절, 운동을 하며 치열하게 보낸 그의 얼굴과 머리카락엔 세월의 더께가 앉아있었다.

“운동을 세게 하셨던데요”라고 하자 설씨는 웃었다. 1978년 세진전자에 입사한 뒤 노동운동을 시작했고 이어서 여성운동을 하며 지낸 10여년. 그 세월을 뒤로 한 채 설씨는 전업주부가 돼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입에선 ‘사업장’ ‘백골단’ ‘지도부 퇴진’ ‘노조분회장’ 같은, 노동운동할 당시의 단어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배를 깎아주는 그의 모습과 왠지 오버랩이 잘 되지 않았다.

“운동하느라 공부도 못했고 돈도 못 벌었지만 그 시절 ‘내가 왜 이런 걸 하고 살아야 하나’ 한 적은 없어요. 1500명 되는 사업장을 돌며 ‘이들의 권익을 대변해야지’ 하는 생각뿐이었어요.”

우연히 친구를 따라 구로공단에 들렀다 일하게 됐고 대인관계 좋다고 공석인 노조간부직을 맡게 됐다지만 우연은 아닌 듯하다. 하여튼 구로공단 방문은 그의 인생을 180도로 바꿔놓았다. 남편도 그렇게 만났다.

노조간부직을 맡다보니 다른 공장의 사람들과 단합대회에 참석하고 교육 받는 일이 많아졌다. 40~50명 되는 노조간부 중 여성은 한두 명뿐이었다. “하루는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이라고 인사하는데 청색 작업복이 잘 어울리는 인상 맑은 사람이데요. 껌을 주머니에 쑤셔넣고 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나눠줬어요.” 1971년 드레스 미싱공장을 시작으로, 공장에 위장취업해 노동운동을 하고 있던 김문수 의원이었다. 당시 김 의원은 설씨를 ‘설 선생’, 설씨는 김 의원을 ‘김 (노조)위원장’이라 불렀다. 설씨는 “좀 어려보였는데 목청 돋우며 노동법 강의할 땐 좀 근사해보였다”고 남편을 기억한다.

1980년 5·18 이후 노동조합정화조치에 따라 수많은 노동자들이 강제로 직장에서 내몰렸을 때다. 금속노조 남서울지역지부에선 김 의원과 부인 설씨 등 5명이 지목됐다. 그만두지 않으면 삼청교육대에 붙잡혀간다고 해서 두 사람 모두 노조지부장직을 그만둬야 했다. 하지만 몇 달 뒤 김 의원에게 삼청교육대 수배령이 떨어졌다. 그가 행방불명되자 사람들은 “빨갱이가 돼 납치된 게 아니냐”며 수군거렸다. 갈 곳 없는 김 의원이 찾은 곳은 설씨네 가족이 운영하던 마포의 제과점. “수개월 전에 ‘정해진 데 없으면 나한테 시집오는 게 어떻냐’고 했었어요. 전 한창 노조운동에 맛들여 신나게 일하던 때라 거절했었고요. 그러다가 갑자기 찾아온 거예요. 당연히 숨겨줬죠.” 설씨는 지금껏 그때 함께 운동하다가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분들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산다.

김 의원을 피신시켜준 뒤로 둘 사이는 한결 가까워졌다. 김 의원은 설씨 가족에게 “만인을 위해 살겠다고 하는 사람인데 한 여자를 못 살리겠느냐”고 설득했고 결국 설씨가 결혼승낙을 했다.

●●결혼해서도 여성 노동자 운동 벌여

결혼 후에도 설씨의 ‘운동’은 계속됐다. “집안일 하느라 남편과의 대화는 단절되고 운동권 동료에게 소외감도 느끼니까 사는 게 허망해지더라고요.” 가사와 육아에만 발목 잡히는 여성의 신세도 억울했다. 남편과 구로공단, 청계피복, 주안공단 등 주요 공단지역에 어머니 노동자를 위한 탁아소를 운영해봤지만 시설과 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이 컸다. 이후 설씨는 뜻 맞는 지인들과 “현장 여성노동자를 결집하자”며 한국여성노동자회를 결성, 그곳에서 활동했다.

▲ 1981년 9월 결혼식. 시위를 열기 위한 `위장 결혼식`으로 의심받고 결혼식장 주변엔 전경버스 다섯 대가 대기해 있었다.
1982년 전노협이 수원농대에서 모임을 열 땐 출동한 경찰을 피해 도망가다가 허리를 크게 다쳤다. “백골단이 쳐들어왔어요. 저는 높은 난간에서 펄쩍 뛰어내리다가 허리를 삐끗해서 기어가다시피하며 도망을 쳤어요. 저 멀리 동료들이 생선 꿰듯 붙잡혀가고 있었어요.” 집에는 걸음마를 하는 한 살배기 딸이 있었다.

피가 원래 뜨거워서였을까. “돌아보면 운동하는 사람들 속에서 일반인과는 좀 괴리된 삶을 살았던 것 같아요. 서점 운영할 때도 사회과학 서적을 사러오는 사람에겐 마음을 담아 잘해줬고, 아닌 사람들은 한심한 듯 쳐다봤어요.”

그러던 설씨는 1992년 경기도 부천에 둥지를 틀면서 ‘운동 생활’을 접었다. 김 의원이 정치에 발을 들여놓으면서부터다. “아이 가진 가정주부가 되고 한 남자의 아내가 되니 이상이나 이념과 실생활은 다르다는 걸 점점 더 심하게 느꼈어요. 일선에서 자꾸 멀어졌고 내 의견보다 남편 의견이 먼저 아닌가 싶었어요.” 강성 운동권 출신이었지만 부창부수(夫唱婦隨)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변절자라고? 지금은 군부독재 시절 아니야”

그래도 남편이 한나라당에 적을 둔 것에 대해 할 말이 없을까. “왜 없겠어요. (운동하면서) 정치권을 싸잡아 비판해왔는데 (남편이) 정치를 한다는 게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기기도 했어요. 발을 들여놓는다고 해도 왜 하필 민주당이 아니라 신한국당이었나 싶었고요. 하지만 남편은 결정한 뒤였고 그 뜻을 존중하기로 했어요.”

김 의원은 운동권 선후배에게서 ‘변절자’란 욕을 숱하게 들어왔다. 그 대목에선 설씨도 준비된 듯한 말을 했다. “(김 의원은) 1990년대 초반 신한국당에 입당했었지요. 그땐 동구권이 몰락하고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에 패배할 때였어요. 이 양반은 운동권의 지향점도 이제 달라졌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설씨는 ‘변절자’라는 말이 싫은 듯했다. “지금도 타도대상이 군부독재라면 (김 의원이) 변절자 맞겠죠. 하지만 지금은 이 나라가 잘 살고 일자리를 만들어 성장 위주로 가야 하는 때가 아닌가요.”

그는 “열린우리당의 일부 의원처럼 어렵게 살고 치열하게 살았던 분들이 한나라당엔 상대적으로 적다”며 “하지만 근대화·산업화 사회의 경제를 성장시킨 주도적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합쳤고 우수한 인재도 많다”고 했다. ‘꼴통 보수정당’ ‘식물 정당’이란 말에 대해선 “반대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낸 말 아니겠느냐”고 했다. 설씨는 “국민의 소리를 듣고 선명야당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가 남편에게 물이 좀 들었다”며 웃었다.

그는 김 의원을 무작정 비판하는 일부 시민단체 사람들을 보면 솔직히 화도 난다. “저 사람들은 대체 어디에서 운동하고 있다가 지금 나와 목청을 높이나 싶을 때가 있어요. 저도 옆에서 봤지만 1980년대엔 다들 목숨 바치고 운동했던 시절이었잖아요.”

●●“이제 내 직업은 전업주부

▲ 아빠 엄마를 닮아 사회 복지에 관심이 많던 딸 동주씨는 카톨릭대 사회복지학과에 재학 중이다.
노동운동가에서 전업주부로 돌아왔다고 하지만 설씨의 기질은 아직 남아있는 것 같다. 노동운동, 정치 등에 대해 말을 꺼내면 준비된 듯한 멘트가 쏟아졌다. “영세 사업장에도 노조가 조직됐다고 하지만 아직 조직 안된 곳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노조가 워낙 큰 사회집단이 된 요즘은, 독거노인 문제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챙겨야할 것 같아요.”

정치에 대한 그의 지론은 이렇다. “사실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국민이 잊고 지낼 수 있는 것, 각자가 내 삶에 충실하고 즐겁게 살 수 있는 것, 그게 잘된 정치 아닌가요?”

설씨는 이따금 ‘정치인 김문수’에 대해 딴지를 건다. 최근 김 의원이 TV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해 대통령의 연정론에 대해 토론을 벌였을 때다. 핏대를 세우지 않은 남편이 약간 못마땅했다. “저는 (정부·여당 사람과) ‘더 싸우지 그랬느냐’고 했어요. 그랬더니 남편은 그래봤자 닭싸움 하는 것밖에 안되고 국민이 알건 다 안다’고 해요.”

그는 정치권에서 강도 높은 비판의 화살을 날리는 남편의 행보를 적극 지지한다. “국회의원의 책임이 정부견제 아닌가요. 동네분들이 간혹 ‘나서다가 다친다’고 걱정해주시지만 저는 ‘잘 싸우라’고 해요.”

설씨는 일주일에 두세 번씩 독거노인과 병원환자를 찾아 목욕 봉사를 다닌다. 성당 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 하지만 지역구민 대부분은 그의 노동운동 전력을 모른다. 3선 의원의 부인답게 누가 정치 현안에 대해 물으면 또박또박 설명해줄 뿐이다. 10월에 있을 부천 원미갑 보궐선거를 앞두고 좀 바빠질 것 같단다.

가톨릭대학 사회복지학과에 재학 중인 동주씨는 어려서부터 사회복지에 관심이 많았다. 얼마 전에도 방학 기간을 이용해 전라도 오지에 가서 2개월 봉사활동을 하고 돌아왔다.

설씨는 “가족끼리 안락하게 살아본 적이 없는 것 같다”고 한다. 노동운동하느라 두 사람이 뛰어다녔고 남편이 구속된 뒤 딸을 탁아소에 맡겨놓고 서점을 운영하던 시절이 지금도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단다. 노동운동하는 사람이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사는 것도 동지들에게 죄스러웠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남편은 24년 만에 어렵게 대학을 졸업하고 이제 하고 싶은 정치를 열심히 하고 있고 딸도 자기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있고요. 모두 감사드릴 일이지요.”

그는 “요즘의 정치인은 다 복받은 사람들”이라고 믿는다. “김 의원처럼 고지식하고 깨끗한 이미지가 생명인 정치인은 아무리 엄격한 잣대가 주어져도 감수해야 할 것 같아요. 현실정치에 참여못하고 스러져간 분이 얼마나 많은가요. 절대로 잊으면 안되죠.”

직업은 노동운동가에서 정치인의 아내로 바뀌었지만 노동운동하면서 동고동락했던 사람에 대한 마음은 변치 않은 것 같았다.

황성혜 주간조선 기자(coby0729@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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