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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내, 내 남편은 국회의원] 민주당 손봉숙 의원의 남편, 안청시 교수②
“내 말 절대 안들어… 자기 뜻 펼치도록 지켜봐주는 게 외조(外助)지”
여성 정치인의 남편이 말하는 여성
▲ 지난 가을 네티즌들과의 번개팅 때 남편인 안청시교수가 참석해 '봉숙아 사랑해'라는 피켓을 들고 있다.
“이건 계약위반이지. 마누라가 정치 시작할 때 우리 서로에게 피해주지 말자고 했었는데…. 설거지 같은 것이야 하겠지만 이건 원 마누라 때문에 끌려다니는 것 같아 기분이 영 안 좋네요.” 지난 8월 19일 강원도 용평에서 만난 서울대 정치학과 안청시(安淸市) 교수의 첫마디였다. 그때 안 교수에게로 부인 민주당 손봉숙(孫鳳淑·비례대표) 의원의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는 왜 했나? 내 지금 이 사람(주간조선 취재기자)들에게 불평하고 있네. 빗길에 여기까지 온 양반들에게 내 굴복은 하겠지만….” 실은 ‘지금 바쁘고 인터뷰는 별 생각 없다’는 짧은 통화만 한 뒤 안 교수가 서울국제포럼 참석차 있다는 강원도 용평으로 무작정 찾아간 터였다.

“내 오늘 주제 발표 내용이 뭔 줄 아쇼? 준법정신 위에 국민 정서가 있고 그 위에 떼쓰는 것 있고,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우리나라가 민주주의의 우등생 그룹에 속하면서도 언제 추락할지 모른다는 내용이오. 그런데 기자들이 요즘도 이렇게 떼써서 취재하고 그러나?” 할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안 교수는 “이왕 일이 이리 됐으니 내 마누라 위한 일이라는데 마누라 위해 할 얘기 있으면 합시다”라며 자리에 앉았다.

차가워진 분위기도 누그러뜨릴 겸, 경상북도 영주의 고향집에서 채소 키운다는 얘기를 물어봤다. 안 교수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두 평도 안되는 조그만 공간에 가지, 수세미, 호박, 봉숭아 등을 키우는 재미가 쏠쏠하신가 보다.

“원 참, 사람들이 얄궂게 말해가지고선. 집사람을 ‘봉숙이’라고 부르는 게 자연스럽지 ‘손 의원’ 그러는 게 오히려 닭살 아닌가요?” 국회 의원회관에서 ‘닭살 커플’로 소문났다고 하자 그가 이렇게 말했다. 안 교수는 손 의원 보좌관에게 “우리 봉숙이 밥 잘 먹여 들여보내~”라고 하는가 하면 회식할 땐 “봉숙이, 많이 먹어~”라며 손 의원의 숟가락에 반찬을 집어 올려준다고 한다.

정치를 하고 여성운동을 하더라도 남편에게 아내는 아내인 법이다. “험한 곳에 아내를 내놓았다는 생각이 혹시 안 드냐”고 하자 안 교수는 “남편인 나도 제어가 안되는 사람인데 다른 남자들이 어쩌겠느냐”며 웃었다.

정치인 아내

손 의원은 국회에 입성한 뒤 그간 걸어온 길과 달리 다소 ‘과격파’의 길을 걷고 있다. 시민단체 출신도 아니고 정당 출신도 아니다. 정치학 박사로 국토통일원과 총무처 중앙공무원 교육원에서 일했고 강단에 숱하게 섰으며 한국여성정치연구소를 설립한 여성·정치계의 거목이다. 그런 그가 이라크 자이툰 부대 철군,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대체복무 인정, 사형제 폐지 등에 있어 소속해 있는 민주당보다 오히려 민주노동당 의원들과 한목소리가 된 적이 많았다.

안 교수는 때때로 “나라면 그렇게 안할 텐데” 하고 말뿐이다. 정치학자의 길과 정치인의 길은 다르기 때문이란다. 안 교수는 “나야 (우리나라가) 미국과의 관계가 좋은 것이 국가안위에 좋다면 (이라크 파병을) 인정하는 편이지만, 아내는 ‘폭력은 절대 안된다’는 강경한 자세”라고 말했다. 손 의원은 비폭력·평화주의를 가장 근본으로 내세워왔다. 안 교수는 “나도 사형제 폐지에 찬성하지만 그렇다고 깃발 들고 마이크 앞에 서진 않는다”며 “교수인 내가 그러면 부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손 의원은 최근 여야 의원 20여명과 회의가 개의되지 않거나 지연되는 사유를 회의록에 기재하는 국회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다. 손 의원은 지난 5월 3일 국회 본회의 개의시간이 예정보다 늦어지자 ‘시간 엄수’라고 쓴 팻말을 들고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내 ‘또 누구다운 짓 했구먼’ ‘좀 참지 뭘 저랬나’ 했어요. 마누라가 내 말을 듣지도 않고 듣는 걸 기대하지도 않아요.”

말이야 이렇게 하지만 정치학자 남편이 보기에 정치인 아내가 지난 1년 간 보여준 ‘정치 점수’는 그리 엉망은 아닌가보다. 안 교수는 “간섭 않고 믿어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내 기분 나빠도 정치적 판단을 강요하거나,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아요. 정치입문 같은 문제야 상의하지만 손봉숙도 어떤 부분에선 절대 양보 않고요. 이라크 파병 문제는 ‘이렇게 반대하는 정치인이 있었다는 기록이라도 남겨야 한다’고 하더군요.”

안 교수는 아내가 국회에 들어가 국가 기틀이나 정치인의 그릇된 행태를 바꿀 것이라곤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저런 것도 정치의 한 방법이구나’ 하는 걸 보여주고 미미하나마 세상의 소금 역할을 한다면 의미 있을 것”이라고 한다.

부인이 소수 정당에 속해 있어 생기는 장점도 있다고 한다. “의정 활동을 크게 뒷받침할 수 있는 원내 정당은 아니지만 그래서 오히려 의원 개개인이 창조적으로 일할 여지가 많은 것 같아요. 당론만 있는 당, 정치가만 있는 당, 이렇게들 말하지만 의원과 정체성으로 당이 만들어진다는 면에서 별 다를 바도 없는 것 같고요.”

첫 만남

▲ 손봉숙 의원의 1985년 이화여대 정치학과 박사학위 수여식.
1964년 서울대에서 열린 ‘모의 UN 안전보장이사회’였다. 당시 서울대 외교학과 2학년생 안청시는 의장 보좌관,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3학년생 손봉숙은 한 국가의 대표로 참여했다. 동갑내기지만 안 교수가 전쟁통에 한 학년 늦었다. 그 후 둘은 버스 안에서 자주 마주치곤 했다.

“뭐가 예뻐? 삐쩍 마르기만 했었지. 한데 대학 3~4년 동안 만날 똑같은 검은 치마, 흰 블라우스 차림이더라고요. 저 나이에 저러기도 힘들겠다 싶고, 한편으론 나 같은 가난한 사람을 좀 알아주겠구나 싶었지.” 대학원에 먼저 입학한 손 의원이 서울대 강의를 듣게 되면서 둘의 만남도 늘었고 시내 영어학원의 타임 해독반에도 같이 다녔다.

1969년 11월 손 의원이 면사포를 썼다. 당시 대학원으로 진학한 안 교수는 해군장교로 복무 중이었고, 손 의원은 이화여대 행정대학원 조교였다. 휘경동의 단칸 셋방 살림은 손 의원의 조교 월급으로 근근이 이어갔다.

이후 1971년 안 교수가 미국 하와이대학의 동서문화센터 장학금을 받으면서 두 사람은 유학길에 올랐다. 이때 생계와 학자금을 보태느라 생활전선에 나선 것은 손 의원이었다. 이듬해 손 의원은 석사과정도 병행했다. 둘째 딸을 임신한 채 낮에는 도서관서 꾸벅꾸벅 졸면서 공부하고, 밤엔 식당의 웨이트리스로 일했다. “아내는 처음엔 한식당서 일하다가 팁을 더 많이 받는 양식당서 일했고, 돈 계산 하면서 영어 좀 한다는 말을 듣곤 음식과 칵테일 주문 받는 일을 하게 됐어요. 나중엔 한인교회 서기도 맡았고요.”

안 교수는 “마누라 고생만 잔뜩 시키고 도울 것도 없어 죽어라고 공부만 했었다”고 했다. 1977년 귀국할 땐 몇 푼 마련할 겸 현지에서 일부러 냉장고와 카펫을 사와서 팔기도 했다. 안 교수는 외교안보연구원에서 3개월간 월급을 선불로 받아 노량진 전셋방을 마련했다. 두 부부는 지금껏 이 6년을 “가장 힘들었지만 가장 행복했었다”고 기억한다.



동지간의 결합

안 교수 부부의 지인들은 두 사람을 “동지간의 결합”이라고 말한다. 안 교수는 “살다보니 그렇게 됐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상대방을 지원하고 자기계발을 했다. 안 교수는 요즘도 주례사에서 “그 자리에 서있지 말고 발전해야 한다”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 손봉숙 의원이 2001년 동티모르에서 UN국제 선거관리위원으로 활동할 때 남편과 함께한 자리.


1971년 하와이 유학길에 오를 때 둘 다 정치학 석사였지만 1977년 돌아올 땐 안 교수만 박사였다. 안 교수는 2년 후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로 부임한 뒤 입버릇처럼 “이제는 당신 차례”라고 말했다. 안 교수를 미국 하와이대학 장학생으로 추천했던 스승도 “안 공만큼은 몰라도 부인도 충분히 소질있으니 공부를 꼭 시키라”고 말했었다.

1980년 손 의원이 통일원에 근무할 때 마침 미국 프린스턴대의 우드로윌슨 스쿨에서 파빈 펠로십 장학생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안 교수는 “나 때문에 매여서 공부 못했다고 불평 말고 자기 능력을 시험해보라”며 부추겼다. 당시 손 의원의 나이가 38세였다. 이때가 바로 손 의원이 여성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

안 교수는 “사춘기인 초등학교 두 딸을 키우느라 좀 어려웠지, 1년 그까짓 것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했다. 1년 뒤 귀국한 아내에게 “밑져야 본전이지, 한번 해보라”며 이화여대 정치학과 박사과정을 밟도록 권했다. 결국 손 의원은 42세 때 ‘한국지방자치연구’로 이화여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후에도 1995년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비교여성연구소 등 외국 대학의 연수 기회가 생기면 손 의원은 별 ‘죄책감’ 없이 떠날 수 있었다. 싫은 기색 않고 지원해준 남편 덕분이었다.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게 아니라 남편 따라 공부하러 가는 일도 많았다. 안 교수가 1988년 미국 프린스턴대학 교환교수로 있을 때 손 의원은 인근 럿거스 대학의 미국 여성정치연구소에서 일했고, 안 교수가 1996년 가을에 싱가포르대학에서 한국정치를 가르칠 때엔 손 의원이 동남아연구소 객원연구소에서 여성학을 공부했다. 안 교수는 “외조를 잘 한다”는 말엔 곤혹스러워하지만 “능력만 있다면 남녀 가리지 않고 뜻을 펼쳐야 한다”는 기본 전제야 확실하다.

하와이 유학길에 올랐을 때였다. 하와이에 도착한 바로 그날, 안 교수는 손 의원에게 운전면허 시험용 미국 교통법규 책자를 줬다. “내일 시험이니 오늘 밤 당장 준비하라”면서. “이기적인 이유였어요. 내가 공부에 전념하려면 수퍼마켓 가고 아이들 학교 데리러 가는 시간을 아껴야했거든요.(웃음) 그리고 여자도 동등하게 뭐든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어요.”

“마누라는 내 소유물 아니야”

안 교수의 태도는 늘 이랬다. 아내를 위해 특별히 무언가를 희생하고 특별히 잘해준다는 자세와는 달랐다. 손 의원이 정치 입문을 상의했을 때도 “능력 있으면 해라. 다만 나를 믿고 할 것은 없다. 서로 간섭하지 말자”였다. 지금도 안 교수는 “나야 잘난 것도 없이 먼저 박사학위 땄지만 기회 있으면 누구든지 먼저 하는 게 좋다”며 “여자라고 양보할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안 교수는 지난해 가을 과로로 쓰러진 뒤 등산, 요가, 국선도, 명상 등에 열심이다. 주말이면 고향집을 찾아 소백산 들꽃도 보고 초암계곡의 물도 마신다. 그러면서 인생을 다시 배운다고 한다. 손 의원은 절반 정도만 동행한다. “정치인도 그렇겠지만 학자도 자칫 자기 틀에 파묻힐 수 있어요. 정년을 얼마 앞두고 요즘은 자연에 정직해지는 법을 배우고 있어요.”

결혼생활 햇수로 35년이지만 말다툼하기는 여타 부부와 다를 바 없다. 그는 “우리 마누라는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편이고, 고집도 세서 한 대 쥐어박고 싶을 때도 있다”며 “산에 올라갔다오면 또 잊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고생하고 싸우며 살아온 게 아깝고, 도시락 버리면 나만 배고플 것 같고, 또 별 달리 대안도 없어 잘 살고 있다”며 웃었다.

“엄마 닮아 말 안듣고 자기 고집대로 산다”는 큰 딸 정현씨는 미국 럿거스대학과 코넬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아리랑 방송국 앵커로 있고, 둘째 딸 정민씨는 이화여대 법대와 일본 규슈대학원을 졸업한 뒤 유통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혹시 손 의원이 3년 후 있을 선거에 지역구에서 출마하겠다고 하면 어떨까. “마누라가 내 소유물도 아니고 각자 영역 갖고 자연스럽게 살아왔는데 부자연스러운 일 없길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제 아무리 능력 있어도 65세 넘으면 대개 은퇴하는 것 아니었던가요?”(웃음)

황성혜 주간조선 기자(coby0729@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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