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기사 경로


기사 본문

[내 아내, 내 남편은 국회의원] 열린우리당 김부겸 의원의 부인 이유미씨①
“결혼 18년 만에 월급봉투 처음 구경했어요”
◎ “돈벌이에 지역구 관리에 힘든 일은 항상 내 몫”
열린우리당 김부겸(金富謙) 의원의 부인 이유미(李由美)씨는 매일 아침 남편이 쏘렌토를 손수 운전해 출근하는 게 좀 못마땅하다. “권위주의를 타파하겠다”는 지역구민과의 약속을 지켜야한다는 남편의 뜻이야 이해한다. 하지만 새벽부터 밤까지 사람들을 만나고 저녁 모임만도 두세 곳씩 다니는 사람이 직접 운전을 하고 다니니 걱정이 앞선다. 김 의원은 “술 마시면 대리운전 기사 부르니 걱정없다”고만 한다.

하긴 작년보다야 상황이 낫다. 지난해 이맘때만 해도 김 의원은 매일 지하철로 출퇴근했다. 45일간 면허정지 처분을 받아서다. 김 의원은 당시 “고향인 경북 상주에서 교통신호를 위반했고, 국회 근처에서 운전 중 휴대폰을 들고 통화하다 적발되는 바람에 벌점이 늘어 45점이 됐다”고 머쓱해 했었다.

그는 “국회의원이 손수 운전하는 게 자랑거리는 아니지 않느냐”며 “택시 잡느라 길거리에서 시간 허비하느니 일분일초라도 아껴서 국정에 최선을 다하는 것도 국민에 대한 책임 아니냐”고 말했다.

사실 이씨의 처녀적 마음을 움직인 것도 김 의원의 이런 소탈함과 넉넉함이었다. 부부가 되어 살다보면 장점이 오히려 단점으로 바뀐다더니 맞는 말이다. “남들처럼 검은색 세단을 끌고 다니진 않더라도 국회의원으로서의 대접은 받아야 하는데…. 남편은 너무나 겸손하다보니 솔직히 국회의원 대접을 못 받고 다닐 때가 많아요.”

아내 입장에선 이런 점이 싫을 수도 있겠다. 이씨를 경기도 군포시 그의 사무실에서 만난 지난 8월 16일은 북측 대표단이 국회를 방문한 날이었다. 그런데 이날 김 의원은 강연회에 참석하러 대구에 갔다. “아침에, 중요한 날인데 국회에 참석 안하느냐고 물었더니 ‘오늘 같은 날은 나 안가도 갈 사람 많으니 상관없다’고 하더군요.”

“생계 책임지는 가장은 우리 엄마”

남편의 살갑고 격의 없음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무조건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형’이라 부르는 거예요. 정감이야 있지만 그런 태도가 오히려 위선적으로도 보일 수 있는 거잖아요. 마음에 안든다고 해봤자 어쩌겠어요. ‘당신은 타고난 정치인이다’하고 말지요.”

이씨는 남편이 지나치게 소박하고 털털하다고 은근슬쩍 흉을 본다. 그렇다고 해서 이씨가 목에 힘이 들어간, 흔히 떠올리는 정치인의 아내 스타일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몇 시간 얘기를 나누다보니 그 역시 남편과 닮은꼴이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됐다” “한번도 인터뷰 해본 적이 없다”며 며칠째 인터뷰를 사양하더니 입을 열자 마음 좋은 이웃집 아주머니처럼 말도 잘한다. 그는 털털거리는 소리가 날 만큼 오래된 구형 쏘나타 승용차를 몰고 문화센터 강좌를 들으러 다닌다. 지금이야 버젓한 사무실 하나에 직원 5명을 둔 컴퓨터 보수·수리업체 대표지만 이유미씨의 인생 자체가 드라마다. 물론 김부겸 의원을 남편으로 만나 얻은 인생이다.

김 의원과 과거 학생운동을 같이했던 후배들은 요즘도 “부겸이형 형수만큼 고생한 정치인의 아내는 없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씨는 서점을 시작으로 경양식집, 찻집, 도서관, 복사집 등 안해본 게 없다. 생계를 책임진 가장(家長)은 ‘남편 김부겸’이 아니라 ‘아내 이유미’였다. 남편은 정치한다고 늘 바빴지만 요즘 말로 하면 ‘백수’나 다름없었다.

서울대학교 앞 신림동의 ‘백두서점’을 남편 대신 운영할 땐 좌경 용공서적을 판다면서 걸핏하면 압수 수색을 당해야 했다. 경찰은 “남편 있는 곳을 불라”면서 이씨에게 “한 번만 더 연행되면 구속시킬 것”이라며 협박도 했다. 지금 대학 1학년인 둘째 딸을 임신한 채 연행돼 경찰서에서 사흘을 지내다 나온 적도 있다.

그러는 와중에 부부싸움도 많이 했다. 한데 내용은 “왜 돈을 안 벌어다 주냐”가 아니었다. “왜 자꾸 안해본 일을 하라고 하느냐”였다. 서점을 그만두자 김 의원이 “건국대 후문 앞에서 경양식집을 운영해보라”고 권했다.

“지하에서 음식장사하면 경찰이 들이닥칠 일 없지 않겠느냐면서요. 자신없다고 못하겠다 했는데 결국 주방에 서게 됐죠. 먹고 살아야했으니까요.” 초등학교도 안 간 두 딸을 집에 둔 채 직접 장보러 다니고 출납·회계를 맡느라 바빴다.

“남편은 머리가 좋아서 뒤에서 남을 일하도록 조정하는 스타일이에요. 제가 못한다고 해도 결국 어쩔 수 없이 나가서 일하게끔 만드니까요.(웃음)”

그래도 그렇지 허구한날 아내를 경찰서에 불려다니게 하고 결혼한 지 18년이 돼서야 첫 월급을 가져다준 남편을 너무 미화하는 것 아닌가. 이씨에게 “대체 뭘 믿고 결혼했느냐”고 묻자 “그땐 내가 뭘 좀 몰라서 결혼했지”라며 웃고 만다.

이젠 지역구 관리 도맡아

▲ 최근 모처럼 가족이 함께한 점심식사 자리에서.
김 의원이 여의도에서 일할 때 지역구인 경기 군포시를 챙기는 것은 이씨의 몫이다. 김 의원이 열린우리당 원내수석부대표를 맡게 된 뒤로 더욱 국회 일이 많아졌다. “남편이 바빠서 못왔다”면서 행사에 대신 참석할 일도 부쩍 늘었다.

지역구에서 지내는 이씨로선 남편이 지역구에 얼굴을 좀더 비췄으면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국회가 열리지 않은 요즘 그는 “이럴 때 좀더 지역구에 신경쓰라”고 당부한다. “(김 의원이) 지역민의 얘기를 많이 전하고 잘 해주면 좋겠어요. 그런 게 다 표로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고요.”

가족으로서 조바심이 나기도 하지만 그는 정치에 관한 한 전체적인 큰 틀을 읽어내는 남편의 능력을 믿는다. “지역에 얼굴을 내보이는 것보다 중앙정치에서 묵묵히 열심히 일하고 인정받는 것도 중요한 것이라 하대요. 그 말도 맞지요. 이쪽(정치계)은 바람 한번 불면 판이 뒤집히고 그러잖아요.”

이씨는 지인 30여명으로 결성된 ‘뚜벅사랑’ 봉사단과 열린우리당 여성 당원 30~40명으로 구성된 ‘Hope Kim 희망봉사단’에서 생활보호대상자와 장애인 복지회관을 대상으로 무료급식 봉사를 한다. 화물터미널 확장 문제, 임대아파트 건립 등에 대해 지역민의 의견을 듣고 남편에게 전하기도 한다. 그는 “결국 아내는 욕을 듣지 않을 만큼 내조할 뿐”이라며 “본인이 잘해서 유권자에게 인정 받아야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이씨가 처음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복학생이던 김부겸 의원을 만난 때는 1979년 10월. 당시 이씨는 대구의 한국은행 직원이었다. “하루는 셋째 오빠가 전화해 동대구역에 나가보니 오빠 친구들이 있데요. 밥 먹고 차 마시는데 앞자리에 앉은 한 사람이 유독 재미있더라고요. 그날 저녁 절 집으로 데려다준 것도 그 사람이었고요.”

그게 시작이었다. 한데 만난 지 몇 달 되지 않아 이씨는 “지명수배된 당신 애인은 어디에 숨어있느냐”며 경찰에 연행돼야 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였다. 직장 사람들은 “앞으로 너무 험난한 길을 걷게 될 것”이라며 말렸다. “사람이 살갑고 넉넉한 게 좋아서” 자꾸 김 의원에게 이끌렸다.

친정 집안에선 반대가 없었을까. 사실 친정 식구들도 학생운동에 관해선 뒤처질 게 없는 사람들이다. 첫째 오빠인 이영훈(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씨도 운동권 학생이었고, 셋째 오빠인 이영재씨는 한신대 학생회장으로 김 의원의 친구였다. 경북대 다니던 이씨의 동생도 학생운동하다 수감생활을 했었다. 특히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복학생 김부겸의 ‘짧은 연설’을 들은 첫째 오빠는 “내 여동생 밥은 안 굶기겠다”며 김 의원 편을 들었다. “민주화는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다. 학생마저 눈치를 본다면 군부세력의 집권연장 음모를 막을 수 없다”는, 전설적인 사자후(獅子吼)였다.

함께 걸은 정치역정

▲ 신혼시절.
1982년 대구 가톨릭 문화회관 강당에서 후배들이 장식해준 색종이 꽃을 배경으로 웨딩마치를 울렸다. 하지만 그후 남편의 길은 색종이처럼 밝지 못했다. 1986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1987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등을 거쳐 1992년, 1996년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 고배를 마셨다.

“1992년 공천에서 탈락했을 때 남편이 끝내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더군요. 우스갯소리 잘 하고 껄껄거리기만 하던 양반이라 어찌나 속상했던지….” 그리고는 1992년 대선 직전 국가보안법 위반(불고지죄)으로 석 달간 감옥살이도 했다. 이씨는 석 달 동안 하루도 안 빠지고 면회를 갔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두 번이나 떨어지자 “입에 풀칠은 해야하지 않겠느냐”며 국회 전문위원직을 일단 맡아보라는 제의도 들어왔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순 없었다. “당장 생활형편은 나아지겠지만 그렇게 되면 하고 싶던 일을 영원히 못할 것 같았어요. 하면 잘 할 것 같은데 기회가 안 주어지니 불쌍하기도 했지요. 그리고 이 사람에게 돈 벌고 살라하면 평생 불행하게 살 것 같았고요.”

세 번째 도전할 때 부부가 정말 죽을 각오로 열심히 뛰었다. 어렵게 지역구 공약을 외울 필요도 없었다. “한번만 도와주세요. 이 사람, 자기 욕심 내는 사람 아닙니다. 도와주면 실망은 안시킬 겁니다.” 결국 민주당 세(勢)가 강하던 군포시에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나와 260표밖에 안되는 차로 당선됐다.

그 후, 한차례 위기는 2003년 찾아왔다. 그해 7월 김 의원이 다른 소장파 의원들과 한나라당을 탈당했다. ‘배신자’ ‘철새’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전 그때 반대했어요.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었고요. 남편 일 도우면서 한나라당 사람들과 봉사활동하며 같이 다녔는데 그분들과 인간적으로 등져야 한다는 게 너무 괴로웠어요.”

그러나 김 의원은 “재선 안돼도 좋다”며 단호했다. 나중에 보니 ‘인간 김부겸’을 보고 뜻을 같이 해준 사람이 있었다. “그때 김 의원을 몰아세우던 분들을 간혹 군포시 행사 때 만나게 되는데 오래간만에 만나면 다들 그렇게 반가울 수 없어요. 그런 걸 가식적으로만 볼 것도 아닌 것 같고요.”

정치인의 아내로 십수년 지내니 그도 어느덧 정치를 이해하게 됐나보다. 이씨는 “동료보다 10년 정도 늦었지만 그런 것들이 다 내공이 됐다”며 “쉽게 당선되기보다는 고생할 만큼 한 뒤 당선돼야 더욱 겸손해질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치인의 아내가 보는 정치

이씨는 아침이면 신문 몇 개를 꼼꼼히 읽는다. 질문을 던지면 성격 좋은 남편은 학생에게 선생님이 가르쳐주듯 설명해준다. 요즘 이씨 걱정은 열린우리당 지지도가 떨어지는 데 있다. “다음 총선에서 위험하지 않겠느냐”고 슬쩍 남편에게 물어보기도 한다.

국가보안법의 ‘피해자’였던 남편을 둔 그에게 국가보안법 폐지 얘기를 꺼내봤다. “이것 때문에 갈등이 많은데 점차 개정해 폐지하는 게 옳다는 건 남편 생각과 같아요. 이 문제로 여야가 싸우는 건 정말 소모적이에요. 한꺼번에 다 없애면 불안해하는 국민도 많은데 합리적으로 결정돼야 할 것 같아요.”

열린우리당 의원의 부인 모임인 ‘우리 가족’에서 그는 회계 역할을 맡고 있다. “공인이라 사생활도 없고 모두들 힘들어해요. 그래도 정치란 가족의 희생 없이는 안되는 것 같아요. 가정생활에 충실했다간 정치를 못할 걸요? 아예 내놓은 사람이라고 여겨야지요.” 이씨는 “정치하는 사람도 그렇지만 아내들도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결혼 후 요즘처럼 마음이 편안한 때가 없었다”고 한다. “파란 많았던 결혼생활 20년이 정말 한순간에 지나가버렸어요. 당장 치를 선거도 없고요.(웃음)” 대출금은 다 못 갚았지만 지역구에 있는 38평 아파트가 ‘내 집’이다. ‘아빠는 간첩’이란 말을 들으며 자란 두 딸은 어엿한 대학생이 됐다. 얼마 전엔 딸 셋을 데리고 제주도에서 3박4일 휴가를 보냈다. 가족이 한자리에 자주 모이진 못하지만 코미디언 아버지 덕분에 늘 웃음꽃이 핀다.

한번은 남편이 워낙 바빠 얼굴 볼 시간이 없었을 때 지방에 강의하러 간다기에 따라나서 봤다. “몇 번 해보니 사람이 할 짓이 못되더라고요. 밥 먹을 짬도 안나요. 그랬더니 이 양반이 ‘내 만날 이러고 산데이~’ 하대요.” 이씨는 “정치란 게 1~2년 후도 내다볼 수 없는 것 아니냐”며 “그저 기도하고 ‘잘 나갈 때 조심하라’고 잔소리만 한다”고 했다.

황성혜 주간조선 기자(coby0729@chosun.com)

 

1 · 2


스폰서




홈
전체기사
맨위로

인기기사

커버스토리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