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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본 2005년] 국제파워 충돌… 2005년이 우리 운명 좌우
특집Ⅰ2005년 한반도 운명, 경제·북핵에 달렸다
2005년으로부터 꼭 100년 전인 1905년 새해 첫날. 서울에서 부산까지 기적소리가 요란했다. 경부선이 개통한 것이다. 20세기가 속도의 시대임을 예고하는 기적소리였지만 한편으로는 곧 닥쳐올 식민지 시대의 어둠을 예고하는 고통의 소리이기도 했다. 같은 날, 압록강 서쪽의 중국 뤄순(旅順)에서는 러ㆍ일전쟁 발발 후 11개월을 버텨온 러시아군이 일본에 백기를 들었고, 두만강 북동쪽에 위치한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파리까지 이어지는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운행을 시작했다.

이처럼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하고 극동 아시아의 지형도를 바꿔놓을 크고 작은 사건이 같은 날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경부선은 오랫동안 대륙과 이어지고 싶어했던 섬나라 일본의 첫 야심작이었다. 그해 9월 11일 부산∼시모노세키 간을 오가는 최초의 부관(釜關)연락선 ‘이키마루(壹岐丸)호’까지 취항함으로써 일본은 그 오랜 꿈을 이룰 수 있었고 한반도는 대륙 침략ㆍ

수탈의 교두보로 전락했다. 이제 일본 앞에는 거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조선의 마지막 숨통을 끊기 전 혹시 모를 열강들의 반발에 대비했다. 미국과는 가쓰라ㆍ태프트 밀약(7월 29일)을 체결하고, 영국과는 제2차 영·일(英日)동맹(8월 12일)으로 관계를 더욱 공고히 했으며 러시아와는 포츠머스 조약(9월 5일)을 체결해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을 우호세력으로 편입시켰다.

사전 정지작업을 모두 마친 일본은 마침내 비수를 꺼내 조선의 목에 들이댔다. 11월에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특명 전권대사로 파견한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토와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의 회유와 협박에도 고종과 대신들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하야시는 11월 17일 고종이 머무는 덕수궁 별채 중명전에서 강제로 어전회의를 열게 하고는 고종의 결단을 촉구했다. 남산에는 대포가 설치돼 서울을 겨누고 있었고, 궁 밖에는 무장한 일본병이 포진해 있어 공포 분위기였다.

그래도 결론이 나지않자 하야시는 이토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토는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대동하고 들어와 대신들 한 명 한 명에게 찬·부(贊否)를 물었다. 한규설ㆍ민영기ㆍ이하영이 반대하고 이완용ㆍ박제순ㆍ이근택ㆍ이지용ㆍ권중현 등 이른바 ‘을사 5적’이 찬성으로 기울자 이토는 다수결로 동의한 것으로 간주하고 외부대신 박제순과 하야시로 하여금 ‘을사조약’에 날인케 했다. 조약에 양국의 최고통수권자인 고종 황제와 천황의 날인이 없어 국제법상으로는 분명 무효였지만 약육강식(弱肉强食)을 일삼던 20세기 초의 국제정치에서는 ‘힘’이 곧 ‘법’이고 ‘정의’였다.

조약체결 후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을사 5적’을 개, 돼지만도 못한 자들이라고 비난했고, 민영환ㆍ조병세ㆍ홍만식 등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국권침탈의 울분을 터뜨렸다.

히로히토 일왕, 떨리는 목소리로 “항복”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1945년. 희망도 잠시뿐 또 다시 짙은 먹구름이 한반도를 뒤덮었다.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裕仁) 천황이 떨리는 목소리로 일본의 항복을 알렸다. 잡음이 심해 잘 들리지는 않았으나 사람들은 그것이 일본의 패전을 알리는 방송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천황의 ‘종전(終戰) 조서’에는 ‘패전’이라는 말도 ‘항복’이라는 말도 없었다. 히로히토는 “참기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가며 성단(聖斷)을 내렸으니 일본의 불멸을 믿고 “천황제라는 국체를 수호하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만의 다짐일 뿐 한반도에는 해방의 감격과 환호의 물결이 넘쳐났다. 사람들은 일장기에 푸른 색을 덧칠해 급조한 태극기를 들고 울며불며 뛰어다녔고, 하루종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쳐댔다.

35년 동안의 일제 통치는 어느날 갑자기 이렇게 막을 내렸지만 우리가 맞이한 해방은 ‘주어진 해방’이었을 뿐 진정한 해방이 아니었다. 더구나 해방은 곧 분단의 시작이었다. 그나마 민주주의 국가 미국이 남쪽에 주둔했다는 사실에 안도할 뿐이었다.

2차대전도 사실상 막을 내린 1945년 8월 11일. 오키나와 주둔 미 제24군단 사령관 존 하지에게 한 통의 전문이 날아들었다. “한반도 38선 이남을 접수하라”는 미 태평양사령부가 보낸 전문이었다. 이미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8월 8일)하고 한반도를 향해 속전속결로 진군하던 긴박한 상황이었다. 하지가 상륙하기 전인 9월 2일 맥아더 명의로 된 ‘조선 인민에게 고함’이란 포고문 제1호가 살포됐다. “일본인과 미 상륙군에 경거망동 하지 말라”는 포고문에 한국인들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을 테지만 그때까지도 상황파악에는 무지했다. 9월 8일, 하지가 이끄는 2개 사단이 인천 월미도에 도착했다. 여운형이 보낸 건준(建準) 대표, 조병옥(趙炳玉)ㆍ정일형(鄭一亨) 등 한민당계, 일반 시민들이 그들을 맞았다. 그러나 반가워하기는커녕 질서유지라는 이유로 일본군으로부터 총탄세례가 날아들었다. 진정한 해방은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미군이 직접 군정을 실시한 남쪽과 달리 북쪽의 소련은 가급적 김일성을 부각시켜 그를 대리인으로 삼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아무리 김일성이 소련군의 비호를 받으며 평양에 입성했다고 해서 국내 토착공산주의자들은 바지저고리가 아니었다. 더구나 33세에 불과한 새파란 젊은이가 새로운 지도부 구성을 주장하는 등 분란을 일으키자 참다못한 박헌영(朴憲永) 등은 분파행동이라며 제동을 걸고 나섰다. 소련도 아직 김일성이 나설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초기에는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10월 14일)를 평양에서 여는 등 김일성 얼굴 알리기에 급급했다.

이처럼 남북으로 확연히 갈린 상황에서 12월 27일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가 AP통신을 타고 국내에 전해지면서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조선에 임시로 민주주의 정부를 세우고, 이를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며 최고 5년 기한으로 미·영·소·중 4개국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발표를, 국민들은 새로운 굴레를 씌우려는 열강의 음모로 생각했다. 먼저 강한 반발을 보인 김구(金九)와 임시정부 계열은 12월 28일에 긴급 임정 국무회의를 열어 ‘탁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설치하고 12월 31일에는 수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서울시민 반탁대회’를 열었다. 초기에는 소극적이었던 이승만(李承晩)까지 반탁정국에 뛰어들면서 ‘결사반대’의 열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그러나 이듬해 1월 2일, 반탁을 주장하던 좌익이 소련의 지령을 받아 돌연 찬탁으로 돌아서면서 해방 후 친일 세력과 민족 세력 간의 대립구도가 갑자기 좌우 대립구도로 바뀌는 예측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좌우의 극단적 편가르기는 중도파들의 설 자리를 빼앗았고, 국내 정세는 극심한 남남갈등의 대결구도로 급속히 재편됐다.

‘대일청구권문제’ 6억달러로 매듭

1965년. 해방이 되고 20년이 흘렀어도 한국은 여전히 일본과 미국의 그림자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일본과는 한ㆍ일수교로, 미국과는 베트남 파병으로 온 나라가 몸살을 앓았다. 20년 동안 단절상태에서 지내왔으나 미래를 위해서는 어떻게든 관계를 재개해야한다는 사실에는 양국 정부 모두 생각이 같았다. 국교수립이야 일본으로서는 언제든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지만 35년의 고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한국으로서는 선뜻 응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양국이 협상테이블에 마주한 것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0월이었다. 예상대로 순탄치 않았다. 회담에 임하는 입장이 너무 다른 데다 구보다 망언, 휴전, 4·19혁명 등으로 궤도이탈이 반복됐다. 그러나 5ㆍ16으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경제개발 자금이 필요했고, 일본은 한창 달아오른 신무경기(神武景氣)를 이어갈 새로운 시장이 필요했다. 소련ㆍ중국과의 ‘반공블록’이 절실했던 미국으로서도 양국 간의 안정이 주요 관심사였다. 줄다리기 끝에 ‘대일청구권문제’를 총 6억달러(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차관 1억달러)로 매듭지었으나 양국 모두 불만이었다. 35년간의 피해보상액으로는 너무 적다는 게 한국인의 불만이었다면, 일본의 당시 외환보유고(18억달러)에 비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 일본인의 정서였다. 그래도 양국 대표는 1965년 6월 22일 한ㆍ일기본조약과 4개 부속의정서에 서명했고 양국 의회는 협정 비준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12월 18일, 이동원 외무장관과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일본 외무장관이 중앙청에서 한ㆍ일기본조약과 협정비준서를 교환함으로써 국교정상화를 위한 험난했던 여정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미국과는 베트남전 파병문제로 시끄러웠다. 베트남전에서 고전해온 미국이 당근과 채찍을 병행하며 한국에 참전을 요청(1964년 5월)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은 한동안 고민에 빠졌었다. 그러나 아시아의 공산화를 막고 6ㆍ25 때 미국에 진 빚도 갚아야 한다는 점을 내세워 참전을 결정했다. 속마음은 경제성장에 쓰일 자본조달에 있었다. 1965년 1월 26일, 파병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면서 베트남전 파병이 급물살을 탔다. 그해 2월 공병ㆍ수송부대인 비둘기부대가, 10월에는 전투부대인 해병 청룡부대와 육군 맹호부대가 베트남에 파병됐다. 1973년 3월 철수를 완료할 때까지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총 31만2853명의 병력을 파병했다. 이 가운데 5000여명이 전사하고 수만 명이 부상을 입었으나 이들이 흘린 피로 벌어들인 10억3600만달러는 우리 경제가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1975년 54억→2년 뒤 100억달러 수출

30년 전인 1975년. 유신체제는 더욱 극에 달했다. 반면 우리 경제는 서서히 자리를 잡아갔다. 1974년 초부터 긴급조치 1~6호를 잇따라 선포해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그해 말 동아일보 광고해약 사태를 야기시켜 비판언론의 기를 꺾어놓았으나 새해가 되어도 개헌바람은 식을 줄 몰랐다. 박정희 대통령은 새해 벽두에 유신헌법과 유신체제 유지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투표결과에 따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며 배수진까지 쳤다. 2월 12일에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73.1%의 찬성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킨 박 대통령은 넘쳐나는 자신감을 무기로 1975년 한 해 내내 비판세력의 목을 더욱 조여나갔다. 그 무렵 남베트남이 북베트남의 대대적인 공세에 힘없이 무너져내리고 결국 패망(4월 30일)에까지 이르면서 국민들 사이에 고조된 위기감도 박 대통령의 전횡에 힘을 실어주었다. 기자협회보를 등록취소(3월 10일)하고 긴급조치 7호(4월 8일)와 9호(5월 13일)로 고려대에 휴교령을 내리고 헌법 논의 자체를 금지시켰다.

이 과정에서 무고한 죽음이 잇따랐다.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8명이 대법원의 상고기각 20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4월 9일)됐고, 서울농대생 김상진이 할복 자살(4월 11일)했으며 장준하(張俊河)가 의문의 실족사(8월 17일)했다.

정부가 인혁당 재건위에 관련됐다고 발표한 8명은 공산주의자도 아니었고 10년 전의 깃발을 다시 세우려한 인혁당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1974년 4월,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 사건을 발표하면서 이들에게 ‘인혁당 재건위’ 딱지를 붙였다. 그해 8월 17일 오후 1시20분쯤 경기 포천군의 약사봉에 오른 뒤 하산하던 도중 벼랑 아래서 주검으로 발견된 장준하의 죽음 또한 의문투성이였다.

정치적으로는 암울했던 해였지만 경제적으로는 희망이 싹튼 해였다. 베트남 특수가 사라진 빈 공간은 중동붐이 메웠다. 1973년부터 시작된 중동 진출이 1975년 들어 더욱 활기를 띠면서 1974년에 8900만달러였던 건설수주액이 1975년에는 7억5100만달러로 껑충 뛰었다. 그해에 도입한 종합무역상사제도는 기업들이 전쟁하듯이 수출에 뛰어들도록 해 1975년 54억달러였던 수출을 2년 뒤에는 100억달러로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해 12월에는 국내 첫 고유모델 ‘포니’가 세계에서 16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2번째로 생산을 시작했다. 미래의 한국을 먹여살릴 자동차 산업이 날갯짓을 시작한 것이다.

2005년 새해가 밝았다.

1905년
- 경부선 개통, 러·일전쟁 종전, 시베리아 횡단열차 운행 시작,
- 부산~시모노세키 ‘부관연락선’ 취항, 가쓰라·태프트 밀약, 제2차 영·일동맹,
- 포츠머스 조약, 을사조약 체결

1945년
- 일본 항복·해방, 모스크바 삼상회의

1965년
- 한·일기본조약 체결, 베트남 파병

1975년
- 긴급조치 7·9호 선포 ‘유신체제’ 강화, 인혁당 재건위 관계자 사형집행
- 서울농대생 김상진씨 할복 자살, 장준하 의문사, 중동 특수, 종합무역상사제 도입,
- 포니 생산 시작

/ 김정형 조선일보 정보자료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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