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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 친필 붓글씨, 베일을 벗다!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 망명… 조선 청년 교육자금 위해 글 써주며 모금… 고베 등 일본 각지서 잇달아 발견돼
▲ 고베 친화여고의 무라카미교장이 박영효의 친필 붓글씨를 들어보이고 있다.


1882년 태극기를 외교 무대에서 처음으로 사용하고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킨, 구한말 개화파의 대표적 인물 박영효(朴泳孝1861~1939). 그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그 곳에서 멈춘다. 그 후의 그에 대한 역사적 편린을 알려주는 친필 붓글씨가 일본 고베(神戶)를 비롯한 각지서 잇따라 발견되고 있어 그에 대한 역사 평가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고베에서 새롭게 발견된 두 점의 붓글씨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道德爲師友’(도덕위사우ㆍ도덕을 스승과 벗으로 삼다)

‘萬法歸一一歸何 只貴惺惺着義疑 疑到情忘心絶處 金烏夜半徹天飛’

(만법귀일일귀하 지귀성성착의의 의도정망심절처 금오야반철천비ㆍ모든 법은 하나로 귀착되고, 하나는 뭔가에 귀착한다. 사고를 철저히 하여 분명함을 얻는 것을 귀히 여기며, 의심하여 정을 잊고 마음 다한 곳에 이르면, 금오(태양)는 야반이라도 하늘을 유유히 날아 가겠다)

 

▲ 지난 11월20일 일본 친화여고에서 열린 박영효 관계 세미나 장면.
두 작품 모두 끝 부분에는 友國女史 玄玄居士 朴泳孝(우국여사 현현거사 박영효)라고 써있다. 물론 현현거사는 박영효의 호이며, 우국여사는 붓글씨를 받은 일본인 도모쿠니 야스코(友國晴子·1858~1925)를 말한다. 박영효는 왜 도모쿠니에게 붓글씨를 써주었으며 그 붓글씨가 아직도 남아있는 것일까.

갑신정변이 실패한 후 박영효는 1884년 12월부터 1894년 8월까지 미국과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보냈다. 그후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확실해지던 1894년 12월 김홍집 친일파정권의 내부대신으로 화려하게 복귀하여 갑오농민군을 진압하고 갑오개혁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민비와의 세력다툼에 밀려 1895년 7월 제2차 망명의 길을 떠났다. 이때 그는 딸 묘옥(妙玉)을 데리고 갔다.

박영효는 주로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보내게 되지만, 조선에서 보낸 자객으로부터 늘 생명의 위협을 받는 처지여서 딸과 같이 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조선에서 친했던 선교사 러셀이 운영하는 나가사키(長崎)의 활수(活水) 여학교에 딸을 맡겼다. 박영효는 어린 딸을 외국에 혼자 두는 것이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1899년경 그가 주로 거주하던 고베로 데리고 왔다. 2년 후 묘옥을 친화(親和)여학교에 입학을 시켰는데, 이때 그의 딸을 받아준 사람이 이 학교 설립자인 도모쿠니씨였다.

박영효 연구를 하고 있는 재일사학자 김경해(金慶海ㆍ66)씨는 “유명한 망명 정객으로 자객의 위협을 받고 있던 그의 딸을 입학시킨 것은 상당한 용기와 각오가 필요했을 것”이라고 도모쿠니씨를 평가했다. 묘옥은 이 학교의 첫 외국인 학생으로서 6년간 수학한 후 1907년 졸업을 하고 조선으로 귀국했다.

▲ 일본 친화여고가 소장하다 경기여고에 기증한 박영효의 붓글씨.
두 점의 붓글씨는 박영효가 1907년 6월 조선으로 귀국하기 전 쓴 것으로 보이며 딸의 교육문제로 신세 진 도모쿠니씨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써 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경해씨는 두 점의 붓글씨에 대해 “일제의 실질적인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의 망명 정객으로서 그의 복잡한 심경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면서 “조국 혁명과 발전에 불타있는 그의 마음을 읽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특히 ‘道德爲師友’는 그의 일본 망명 생활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01년 당시 일본에는 박영효를 비롯 개화파 정객 30여명이 체류해 있었다. 일본은 이들 망명객을 조선의 세력확대에 이용하려는 의도에서 그들에게 매월 생활비 및 활동비를 제공했다. 일본 정부로부터 자금을 수령하지 않은 사람은 박영효를 비롯한 3명뿐이었다.

또한 박영효는 1894년 3월, 도쿄에 친린의숙(親隣義塾), 1901년 5월 고베에 조일의숙(朝日義塾)을 설립하여 조선인 청년의 교육에 힘을 썼다. 그는 학생의 생활비와 교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일본 전국을 돌며 모금운동을 폈다. 철종의 딸인 영혜옹주와 결혼한 부마이자 조선을 대표하는 개화 정치가라는 점에다 구한말을 대표하는 서예가로서 알려진 그였기에 일본인들 사이에 꽤 인기가 높았다.

박영효가 당시 일본 전국을 돌며 쓴 붓글씨가 돗토리(鳥取)현, 시마네(島根)현, 홋카이도(北海道), 히메지(姬路)시, 고베시 등에서 발견되고 있다. 돗토리현과 시마네현에서만 지금까지 6편이 나왔으며 최근 고베에서도 1편이 나왔다. 이들 붓글씨는 모두 7언절구의 한시인 점이 특징이다. 김경해씨는 “박영효는 1엔(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100만원으로 추정) 이상의 기부를 한 사람에게 붓글씨를 써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 발견된 그의 붓글씨는 내용이 모두 다르며 그 내용도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다”면서 “일본인은 그의 붓글씨를 매우 소중하게 여기고 보존했을 것”이라며 앞으로 그의 붓글씨가 잇따라 발견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박영효 일가, 생사도 모른 채 살아와

박영효의 붓글씨는 그의 슬픈 가족사의 비애를 알려주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기도 했다. 위의 두 붓글씨는 친화여자고교의 교장인 무라카미 요시노리(村上義德)씨가 설립자 도모쿠니씨의 유품을 찾는 가운데 발견된 것으로, 김경해씨와 그가 박영효와 박묘옥의 친·인척을 수소문 하는 가운데 새로운 가족사가 많이 발견됐다.

묘옥은 박영효의 셋째 부인 범(范)씨와 사이에 태어난 2남1녀 중 외동딸이다. 박영효가 갑신정변에 실패하자 범씨는 대역죄로 살아남지 못함을 알고 두 아들을 데리고 한강에 투신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런데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아들 중 한 명인 박흥원(朴興元)은 박영효 등이 갑신정변을 계획한 서울 봉원사 주지(이화여대 근처)로 있었으며 그 아들 박혜륜(朴彗輪ㆍ87)씨가 그 뒤를 이어 이곳에서 스님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이 새로 밝혀졌다. 또한 박묘옥은 인천의 부호 한갑현씨와 결혼하여 5남2녀를 두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 갑신정변의 네 주역. 왼쪽부터 박영효,서광범,서재필,김옥균
지난 6월 박혜륜씨와 묘옥의 손자인 한모씨가 봉원사에서 감동적인 만남을 이뤘다. 박혜륜씨는 한모씨의 숙부이지만, 같은 땅에서 오랜 기간 살고 있으면서도 그 생사 여부도 모른 채 살아온 것이다. 이런 박영효 일가의 비극은 박영효의 인생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 민족의 비극의 역사와도 상통하는 바가 있다.

박영효는 국권피탈 뒤 일본으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고 1911년 조선귀족회 회장, 1918년 조선은행 이사, 1926년에는 이완용의 뒤를 이어 중추원 부의장을 맡아 1939년 죽을 때까지 이 자리를 차지하며 이른바 ‘친일(親日)’의 길을 걸었다. ‘조선의 국가 개조’를 추구했던 한 혁명가이자 개혁파인 그의 ‘친일’, 슬픈 역사의 한 단면을 말해주고 있는 대목이다.

친화여자고교가 소장한 두 점의 붓글씨 중 ‘道德爲師友’는 이 학교에 보존되어 있고 또 다른 한 점은 올해 박영효의 넷째 부인의 손녀가 다닌 경기여고의 경운박물관에 기증되었으며 두 학교는 이를 계기로 자매 관계를 맺었다.

교토=이정희 교토소세(京都創成)대 교수ㆍ경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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