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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동생 안정근, 청산리전투서 맹활약
1920년 홍범도 장군과 함께 참전… “아군, 3일간 한끼도 못 먹어” 임정에 참상 보고
▲ 러시아군 장교 시절의 안정근, 왼쪽은 당시의 러시아 여권
안중근의 동생으로만 알려져 있던 안정근을 ‘독립운동가 안정근’으로 본격 연구한 사람은 소설가 송우혜(宋友惠)씨였다. 송우혜씨는 홍범도(洪範圖) 장군을 소재로 소설을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던 중 안정근의 활약상을 발견하고 그를 ‘독립운동가’로 태어나게 했다.

1910년 봄, 안정근은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누이동생 안성녀(安姓女), 형의 유족, 자신의 가족, 안공근의 가족 등 권속 모두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해외 망명을 선택하게 된다. 안정근의 첫 망명지는 북만주였다. 다시 얼마 뒤 로서아(露西亞, 러시아)로 옮겨간다. 안정근은 1919년 말 중국 상하이로 이주하기 전까지 정확히 10년간 러시아 땅에서 산다. 안정근의 집에는 수많은 우국지사, 독립운동가 등이 머물기도 하고 다녀가기도 했다고 한다. 송우혜씨의 연구에 따르면 1910년대 초반 독립운동에 뛰어든 이광수도 1914년 초 한 달간 안정근의 집에 머문 일이 있다. 박태정 여사는 “어머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상하이 시절에도 춘원 이광수·이동휘·이동녕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 그리고 이강 전하(의친왕)도 아버님 집을 찾아왔었다고 합니다”고 말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극도로 빈궁하게 살았다. 그런데 안정근이 망명 생활을 하면서도 독립운동가들을 접대하며 물심으로 지원할 수 있었던 데는 장모 왕재덕(王在德)의 경제적 뒷받침이 결정적이었다. 왕재덕 여사는 홀몸이 된 이후 자수성가로 큰돈을 번 신천의 갑부였다. 왕재덕 여사는 사위 가족의 망명 생활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했다. 박태정 여사는 “어머님(이정서씨)은 몰래 국내에 들어와 친정어머니(왕재덕 여사)가 주시는 돈을 옷 속에 찬 돈전대에 숨겨 가지고 가시곤 했답니다”라고 말한다.

러시아 군 입대해 독립운동

망명객 안정근은 러시아 니콜리스크에 머물면서 일제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다. 그는 얼마 뒤 러시아군으로 1차대전(1914~1918)에 참전한다. 이를 입증하는 증거는 안정근이 러시아군복 차림으로 찍은 사진과 ‘불환선인단(不還鮮人團)-시베리아 지방’ 제6권에 기록이 남아 있다. 안정근이 러시아군에 자원 입대한 배경에는 일본 측이 러시아 측에 안정근의 체포를 요청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박태정 여사는 안정근이 위생장교로 복무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1919년 3월, 중국 길림성에서 조소앙이 기초한 ‘대한독립선언서’에 안정근은 39인의 해외 독립운동가 서명자 명단에 올라 있다.

안정근이 상하이로 이주한 것은 1919년 늦가을이었다. ‘독립신문’ 11월 4일자는 안정근이 임시정부 수뇌부 취임식에 하객으로 참석했음을 보도하고 있다. 안정근이 상하이로 온 이유는 독립신문 기사에 나와있는 것처럼 형의 유자녀, 자신의 장남(원생), 아우 공근의 장남의 교육을 위해서였다. 이때 1916년(호적상은 1918년) 러시아에서 태어난 진생은 어머니와 함께 러시아에 남게 된다.

상하이에서 안정근은 독립운동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안정근은 임시정부 내무차장과 대한적십자회 최고책임자를 겸하게 된다. 안정근은 상하이에서 결성된 독립운동단체 신한청년당 이사로 활동했고 임시정부 황해도 담당 조사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 광복 후 상하이로 돌아온 안정근

처참했던 청산리전투 독립군 귀환


안정근의 임정 활동 중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북간도 파견위원’으로 현지에 파견된 사실이다. 북간도(北墾道)는 지정학적 위치로 수많은 독립운동단체들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무장독립운동단체들 간의 대립과 알력이 심해지고 이로 인해 현지 여론이 악화되자 임시정부는 두 명의 파견요원을 엄선했다. 안정근과 왕삼덕은 1920년 5월 파견된다. 안정근과 왕삼덕은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 독립군 장정 모집, 의민단 고문으로 독립운동을 지도하며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두 사람의 노력으로 대한국민회, 의민단(의군단), 신민단, 한민회의 4개 주요 단체가 통합된다.

1920년 10월 21일의 청산리전투는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이 완전한 통합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군과 벌인 전쟁이다. 4개 단체 연합부대는 대한국민회 홍범도 사령관의 지휘 아래 청산리전투에 참전했다. 청산리전투에 참전한 안정근은 전투 상황을 임시정부에 보고한다. 그가 보낸 보고서 중에는 ‘…피아 양군은 3일간 전투를 개시하여 쌍방 모두 사상자 300여명에 이르고 아군은 모두 퇴각하여 사방에 주둔 중, 3일간 전투에서 한 끼조차도 먹지 못한 아군의 참상은 형언할 수 없다…’가 있다. 안정근은 청산리전투 후 독립군들이 러시아로 이동할 때 지원작전을 지휘했다. 그때 안진생의 나이 다섯 살이었다. 박태정 여사는 “남편은 어릴 적 청산리전투에서 돌아오는 아버지를 마중나갔다가 마주친 독립군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남편은 어머님(이정서)의 손을 잡고 집밖에 나가 있었는데, 돌아오는 독립군의 모습이 너무나 비참해 무섭다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군복은 해어질대로 해어져 거의 누더기가 되어 있었답니다. 고드름이 독립군들의 얼굴에까지 매달려 있어 도무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아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얼굴에 고드름이 매달린, 흉측한 몰골이 잊혀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북간도 파견위원 활동을 끝낸 안정근은 가족을 데리고 다시 상하이로 온다. 상하이에서 안중근 유가족을 포함한 네 가족이 함께 살게 된다. 안정근은 대한적십자사 최고책임자 활동을 재개하고 한편으로 임시의정원 의원이 된다. 안정근은 1925년 자기 가족만 데리고 산둥반도 동쪽 끝 항구도시 웨이하이웨이(威海衛)로 이주한다. 신병 치료 때문이었다. 웨이하이웨이에서 투병하며 머문 기간은 1925년부터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까지. 웨이하이웨이 시절, 주목할 만한 일은 안정근이 선단을 건조하려고 시도했다는 사실이다. 박태정 여사의 회고다. “아버님은 어선 사업을 했어요. 기회가 오면 본국에 상륙하기 위해 어선 겸 공작용 선박을 건조시키다가 정보가 누출돼 일제가 현장을 덮치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죠.”

중·일전쟁이 터지고 일본이 중국대륙을 유린해가자 중국 정부로부터 더 이상 보호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안정근은 또다시 가족을 이끌고 홍콩으로 피난을 간다. 홍콩으로 피신한 안정근은 공작선 건조 구상을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믿을 수 있는 가족 중 한 명을 선박 전문가로 만들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른다. 안정근은 1938년 차남 진생을 이탈리아로 보내 조선공학을 공부하게 한다.

베트남까지 피신해 궁핍하게 살아

홍콩 피난 중 안정근 일가는 잠시 안남(현 베트남)으로 내려가 살기도 했다. 일제가 패망하자 안정근 일가는 다시 상하이로 돌아왔고 60세가 된 안정근은 적십자사 활동과 함께 한국구제총회 회장직도 맡게 된다. 한국구제총회는 만주, 중국 대륙 각지에 흩어져 있던 동포들의 조국 귀환을 지원하고 어려운 처지에 빠진 이들을 돕는다. 한국구제총회장 시절 중국 대륙에 흩어져 있던 많은 한국인들이 그를 찾았다. 이들 중에는 일본군 장교로 있던 일단의 그룹도 있었다.

“아버님을 찾아온 일본군 장교 중에는 박정희가 있었답니다. 정일권씨, 문익환 목사도 역시 아버님을 만나고 돌아갔다고 해요. 이 사실은 박정희 대통령이 남편이 대사직에 있을 때 남편에게 직접 ‘일본이 망해갈 때 부대에서 이탈해 고명하신 안정근 선생을 찾아 뵌 일이 있다’는 얘기를 했답니다.”

박정희가 왜 일단의 한국인 출신 일본군 장교들과 함께 안정근을 찾아갔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박태정 여사는 “당시 독립운동 그룹에서 일부러 일본군에 사람을 넣었다는 얘기를 어머님으로부터 들었다”면서 “일본군 장교 중에는 독립운동과 관계한 분이 많았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또다른 증언이 있다. 안정근의 둘째딸로 김구의 큰며느리가 된 미생씨가 상하이에서 귀국한 것은 1946년. 안미생은 당시 경향잡지사와 인터뷰를 하면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한다.

‘…우리 아버지는 일차구주(歐洲)대전에도 출정하셨지요. 그 후에는 조선 내에서 유망한 청년들을 비밀히 모집하며 중국군관학교에 입학시켰는데 우리 어머니가 조선에 왕래하시며 그 연락사무를 많이 보셨습니다. 그리고 조선인으로서 일본장교가 된 사람 중에는 우리 아버지가 일부러 그러케 드려 보낸 이도 많습니다. 그것은 일본의 내정을 살필 겸 일단 유사시에는 필요하게 써보려는 계획이었지요.”

광복이 되고 조국에 새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안정근이 귀국을 미룬 이유는 한 가지였다. 여순에 있는 형님의 유해를 찾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그는 장개석과 접촉하며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여순이 공산군의 수중에 떨어져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 그러던 중 뇌암이 악화되어 1949년 3월 17일 상하이에서 숨을 거둔다. 중국 신문은 안정근의 죽음을 가리켜 ‘한국혁명원로 서세(逝世)’라고 기사를 썼다.


[안중근 유가족의 현재] 파나마·미국·독일 등 각국에 뿔뿔이 흩어져

▲ 1940년대 독일에 살던 안봉근 부부와 안진생(왼쪽)
국제인 가족. 안중근 유가족 일가에게 꼭 맞는 말이다. 현재 중근, 정근, 공근 3형제의 자녀들 중 살아 있는 사람은 딱 한 명이다. 안공근의 딸 연생(蓮生)은 현재 중앙아메리카 파나마에 살고 있다. 1910년 3월 26일 이후 안중근의 유가족뿐만 아니라 사촌들까지도 조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그 후손들은 세계 여러 나라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다. 안중근의 직계 자녀들은 중국 대륙이 일본군 손아귀로 떨어졌을 때 상하이에서의 불미스러운 일로 한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미국에서 자리를 잡게 된다.

독립기념관장을 지낸 안춘생(安椿生)씨는 안중근 사촌 형님의 아들이다.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의 맏형(안태진)의 손자인 것이다. 안중근 3형제의 유가족이 국내에 없다보니 그동안 안춘생씨가 안중근 유가족을 대표하는 일을 맡았다.

안중근의 부친인 안태훈의 동생 태건은 슬하에 3남을 두었는데, 장남인 봉근(奉根)은 일제 치하 당시 독일에 건너가 살았다. 손기정이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했을 때 독일방송에 손기정이 일본인이라고 소개되었다. 이때 방송국에 찾아가 손기정은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고 정정한 사람이 바로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봉근이었다.


[안정근 차남 안진생은?] 한국인 최초 조선공학 박사… 어업차관 도입 계기로 외교관의 길 걸어

▲ (왼) 제노아공대 박사수여자 앨범속의 안진생. / (오) 이탈리아 시절 지하조직 활동을 할 때의 안진생(윗줄 오른쪽 끝)
안진생(安珍生)의 이탈리아 유학에는 중국인 신부가 후원을 하게 된다. 중국 국적의 안진생은 이탈리아 중국인 학생회장을 지냈고, 1945년 7월 이탈리아 제노아공대에서 조선공학 박사학위를 받기에 이른다. 안진생은 제노아조선소 근무를 거쳐 1947년부터 1953년까지 미국에서 회사생활을 한다.

안진생이 이탈리아 제노아대학에서 조선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1945년 7월. 2차대전이 한창일 때는 무솔리니 정권에 대항하는 저항군에 가담해 활동하기도 했다. 박태정 여사에 따르면 안진생은 이탈리아 지하조직의 일원으로 비행기에 포탄을 실어나르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

안진생은 미국에서 회사생활을 했는데, 이때 미국에 체류 중이던 이승만 박사와도 교유를 했다. 1953년 서른여섯 살의 안진생은 이승만 대통령의 제의를 받고 처음 아버지의 조국땅을 밟고, 1954년 안진생은 서울대 사대 출신인 박태정과 결혼을 한다. 안진생은 해군 대령으로 3년간 복무한 뒤 대한조선공사 부사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박태정 여사는 “남편은 그때 한국 사회가 얼마나 부패했는지를 뼈저리게 깨달았고 무척 실망했었다”고 회고한다.

18년간 외교관으로 해외 근무

5ㆍ16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1962년 안진생을 찾는다. 이탈리아로부터 어업 차관을 얻어야 하는데 국내에서 이탈리아어를 하는 사람은 안진생 한 사람이었다. 박정희는 안진생을 이탈리아 참사관으로 발령낸다. 이때부터 18년간 외교관 생활을 했다. 이탈리아 참사관, 프랑스 공사, 네덜란드 대리대사를 지내면서 주로 한국 정부의 차관 협상을 주로 전담했다. 안진생이 네덜란드 대리대사로 있을 당시 일본 대사의 부인은 이토 히로부미의 외손녀였다. 안진생은 일본 대사의 부인과 만났고, 이 기사는 조선일보에 실리기도 했다. 안진생은 이후 자이레 대사, 콜럼비아 대사, 미얀마 대사 등을 지냈다. 박정희 대통령은 안진생 대사를 만날 때마다 부친 안정근과 얽힌 얘기를 하면서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이는 박태정 여사의 증언이다.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남편에게 ‘안진생 대사는 숨어 있는 애국자’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매년 가을 남편에게 서신을 띄웠고 추석 때마다 선물을 보내오곤 했습니다.”

안진생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1980년 외교안보연구원 대사직에서 강제로 옷을 벗는다. 그는 이때 충격을 받고 뇌경색으로 쓰러져 치료를 받다 1988년 12월 24일 숨졌다. 안중근숭모회 김영광 이사는 “안진생 대사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평생을 봉사했다”고 말했다. 안진생은 해군대령 3년과 외교관으로 18년을 지냈지만 국립묘지에 묻히지 못하고 용인 천주교 묘지에 묻혔다.

조성관 주간조선 차장대우(mapl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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