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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속살 엿보기] ⑨ 사그라지는 ‘500년 전통’ 종로
정치·역사·문화·욕망의 현장…1970-80년대 ‘압구정로’
광화문 교차로 교보빌딩 앞에는 커다란 비각(碑閣)이 서 있다.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차를 타고 혹은 걸어서 이 비각 옆을 오고 가지만 정작 이 비각의 뜻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 교보문고 앞 비각, 돌문에 '만세문'이 보인다.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인 1902년, 고종 황제가 51세가 되고 보위에 오른 지 40년을 기념해서 세워진 게 이 기념비다. 이 비각에 들어가는 돌문에는 좀 서툰 글씨체로 ‘만세문’이라고 새겨져 있다. 아래에는 ‘영왕육세서(英王六歲書)’라는 글씨가 보이는데 이는 엄비 소생 영친왕 이은(李垠)이 여섯 살 때 쓴 글씨라는 뜻이다. 영친왕은 나라를 잃은 백성들이 일제에 대한 분노를 느끼고 독립 의지를 불태우게 하는 인물이었다. 일제가 어린 영친왕을 납치해갔기 때문이다. ‘만세문’은 영친왕이 납치되기 직전에 쓴 것이다. 일제는 1910년 한일병탄 이후 돌문을 떼어버렸다. ‘만세문’의 글씨가 조선 백성들을 자극하는 것을 우려했던 까닭이다. 종로로 떠나는 산책은 이 비각 앞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비각 앞 잔디밭 위에는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표석(標石)이 하나 있다. 무릎을 꿇고 앉아서 찬찬히 들여다봐야 이 돌에 새겨진 글을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글씨가 희미하다. 도로원표다. 현재는 광화문 교차로 코리아나호텔 옆, 월드컵 기념으로 만든 축구공 구조물 앞에 도로원표를 설치했으나 원래 자리는 이 비각 앞이다. 하지만 이곳이 너무 협소하자 100여m 떨어진, 좀더 널찍한 공간으로 옮기면서 주변에 대리석 의자를 만들어 미니 공원화했다. 비각 앞 원표를 자세히 보면 매우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 ‘km’라는 표시 대신 ‘千米(천미)’라고 표기한 것이다. 그래서 서울-부산 477千米, 서울-신의주 505千米라고 표기했다. ●피마길은 ‘먹거리’로도 유명
▲ 종로2가 옛 종로서적 뒤편
교보문고를 지나 종각 쪽으로 가다보면 제일 먼저 만나는 게 피맛골(피마길)이라는 이정표다. 조선시대 서민들이 동대문에 들어와 6전(廛)이 열리는 종로로 빨리 가도록 만든 길이다. 즉 개나리봇짐을 진 서민들이 큰길인 종로를 걷다가 행여나 “길을 비켜라, 삼봉 대감 행차시다”라는 소리를 듣게 되면 누구 할 것 없이 가던 길을 멈추고 무릎을 꿇고 흙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가마 행렬이 지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갈길이 바쁜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급한 사람들은 가마를 피해서 빨리 가라는 뜻으로 종로통 양쪽 뒤편에 골목길을 만든 게 ‘피마(避馬)길’이다. 이 피마길은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사람 냄새가 켜켜이 배어있는, 종로를 종로답게 만드는 가장 낭만적인 골목이다. 너비 2m가 조금 넘어보이는 피마길은 원래 종로통 양옆으로 나 동대문까지 이어졌으나 현재는 동대문을 바라보고 왼쪽만 종묘(宗廟)까지 남아 있고 오른쪽 피마길은 도로확장으로 사라져버렸다. 피마길을 포함해 종로통과 연결된 크고 작은 골목길들은 전부 종로의 역사에서 유래된 이름을 갖고 있어 길이름의 유래만 알아도 종로의 어제와 오늘을 절반은 아는 셈이다. 교보문고 후문 쪽의 피마길은 먹자골목으로 유명하다. 열차집, 전주집, 대림식당 등이 생선구이와 빈대떡으로 이름을 얻은 집들이다. 간판도 실내도 후줄근하지만 맛 하나는 끝내준다. 피마길이 시작되는 교보문고 뒤편은 빈대떡 가게들로, 피마길이 종로구청길과 만나는 부근은 낙지집으로, 청진동길과 만나는 곳은 국밥(해장국)거리로 유명하다. 피마길은 이렇게 종묘까지 이어지며 구역마다 특징있는 거리를 파생시켜왔다. 피마길에서 파생되는 길에 다양한 종류의 저렴한 맛집들이 들어선 것은 피마길을 이용하는 서민들의 입맛과 호주머니 사정을 반영한 결과다. 피마길이 청진동길과 만나기 직전에 한귀남(韓貴男ㆍ57)씨가 운영하는 시인통신이 있고 종각역 교차로 옛 신신백화점 자리에 있는 제일은행 본점 뒤편에는 한일관이 나온다. 1939년 화선옥으로 태어나 1945년에 한일관으로 이름이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3층 건물은 1957년에 세워졌다. ‘정치 1번지’ 종로에 위치한 까닭에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수많은 각계 명사들이 즐겨찾았다. 지금도 이곳에 가면 은퇴한 명사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종로2가 뒤편의 피마길에는 전봇대집(혹은 고갈비집)이 유명하다. 드라마
▲ 피마골에서 본 종로타워,전통과 첨단이 공존하는 곳이 종로다. 오른쪽은 종로3가 돈의동 쪽방촌
‘야인시대’에서 구마적 역을 맡고 있는 연기자 이원종씨가 단골이다. 종로구청 앞길은 삼봉길이다. 태조의 수족으로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을 창업한 삼봉 정도전(鄭道傳). 삼봉의 집은 지금 종로구청이 있는 자리에 있었다. 삼봉은 1394년 한양 정도(定都)를 포함해 한양의 모든 궁전 이름을 지었다. 조선을 만들고 서울을 만든 사람이 삼봉이었다. 기자가 종로 일대를 누비며 다리품을 판 것은 12월 4~6일까지였다. 우연의 일치지만 이 기간은 한국 근대사에 있어 그리고 종로사(史)에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날들이다. 지금으로부터 118년 전인 1884년 12월 4일 밤 우정국 개국 축하연 때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등이 중심이 된 개화파가 자주 독립과 근대국가 실현을 위해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거사를 일으켰다. 갑신정변이다. 그러나 정변은 3일 만에 청군(淸軍)의 개입으로 실패로 끝나고 김옥균은 12월 6일 동지들과 함께 일본 망명길에 오른다. 그의 나이 서른세살. 갑신정변은 김옥균의 ‘3일 천하’로 끝났다. 보신각, 종로타워(밀레니엄 플라자), 영풍문고, 제일은행 본점이 각기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종각역 교차로에서 안국동 방향으로 뻗은 길이 ‘우정국로’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우정국(郵政局)이 이 도로변에 있다 해서 붙여진 우정국로는 서울에서 한자로 된 간판이 가장 많은 길이다. 사실 서울을 찾은 구미인들은 서울 거리의 상호들을 보고 놀라곤 한다. 한국 중국 일본 3국이 모두 한자문화권 국가들인데 유독 한국에서만 한자 상호의 간판을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엉터리 영어 간판들이 즐비한 서울의 거리에서 한자 상호를 만난다는 것이 생경하게 느껴질 정도다. 梵鐘社, 佛事院, 聖鐘社, 祥阿佛敎社, 乙酉文化社, 吉祥苑, 大新堂筆房, 宋紙房… 등은 나날이 부박(浮薄)해져만 가는 서울이 정도 608년의 고도(古都)였음을 상기시킨다.
▲ 우정국로의 조계사,종로2가 젊음의 거리에서 노상공연,지난 6월4일 문을 닫은 종로서적
조계사 옆 갑신정변의 현장인 우정국 자리는 지금 공사 중이다. 서울시에서 우정국 주변을 시민휴식공간으로 꾸미기 위해서 기존의 가게들을 매입해 철거작업을 하고 있다. 우정국 한쪽에는 축하연에 참석한 김옥균을 비롯한 19명의 좌석 배치도가 그려져있다. 118년 전, 12월4일 밤 우정국 안팎에서 벌어진 일들을 전부 목도한 유일한 증인은 수백년이 넘은 고목 한 그루. 고목은 철제 빔의 부축을 받으며 머리를 우정국 지붕에 떨군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날 밤 거사를 일으킨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은 우정국을 나와 행동대 서재필 등과 합류하여 인사동 박영효 집을 지나 일본공사관(현 천도교중앙회관)으로 향했다. 그 박영효 집은 훗날 공주 갑부 김갑순이 살기도 했으나 지금은 인사동 경인미술관 겸 전통다원으로 변했다. 한때 도심 속의 한적한 정원 분위기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으나 비좁은 마당에 현대식 건물 두 동을 지으면서 그 한옥 정원이 빚어내는 멋스러움을 잃어가고 있다. 경인미술관을 나와 인사동 입구로 가다보면 전통의 거리 인사동과 어울리지 않는 고층빌딩 인사아트플라자가 보인다. 소설 ‘상록수’의 작가 심훈(沈薰)이 살던 집터다. ●이완용 집터엔 벼락 떨어져 인사동 사거리에서 우정국로와 연결되는 길이 태화관길이다. 종로에서 이 길에 있는 12층 태화빌딩만큼 파란만장한 영욕(榮辱)의 역사를 보듬고 있는 건축물도 없을 것이다. 일제 당시 요정 명월관의 분점인 태화관. 이 태화관에서 기미년 3월 초하루에 민족대표 33인이 모여 독립선언을 했다. 여기까지는 교과서에 나오는 얘기이고 기구한 역사는 더 거슬러 올라간다. 병자호란을 당한 인조가 자랐던 집, 즉 인조의 잠저(潛邸)가 태화관 터였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극을 이루던 시기에는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의 집이 되었다. 다시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가 안동 김씨였던 연유로 이 집에 살게 되면서 순화궁으로 불린다. 이 집은 1908년 친일파의 거두 이완용(李完用)에게 넘어가 그의 사저가 된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을사오적(乙巳五敵)으로 지탄을 받던 이완용이 밖에 나다니지도 못하고 아들도 일본 유학을 간 사이 집에 칩거하다가 며느리와 눈이 맞는 패륜(悖倫)을 저지른다. 이 패륜 사실이 알려지자 아들은 자살한다. 이완용이 이 집을 기피한 것은 이 집에 벼락이 떨어진 뒤였다고 한다. 서울 최고의 요정이었던 명월관은 이완용이 살던 태화정을 인수하여 태화관이라 불렀다. 33인은 애초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하기로 했으나 계획이 누설될 것을 염려해 2층에 넓은 방이 있던 태화관을 독립선언 장소로 선택했다. 1950~70년대에는 태화기독교사회관이 들어서 있었다. 이 태화빌딩 옆에는 ‘순화궁터’ 표석과 ‘삼일독립선언유적지’라는 돌이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서 있다. 옛 태화관 사진도 하나 없다. 자랑스러운 민족사의 현장이 후손에 의해 홀대를 당하고 있는 것만 같아 부끄럽다. 한편 태화빌딩 옆 한미은행 종로점 자리는 한말 문신 민영환(1861~1905)의 집터다. 을사보호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민영환은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을 만난 뒤 조용히 자결했다. 한미은행 앞에는 그의 순국을 기념하는, 잘 만들어진 조형물이 눈에 띄는 곳에 놓여 있다.
▲ 종묘의 정전,탑골공원 내 손병희 선생 동상
우정국로에서 벗어나 종로통으로 들어가보자. 일제시대의 화신상회에서 시작해 1987년까지 종로를 지킨 화신백화점은 서울의 명물(名物)로 유명했고 지금 이 자리에는 종로타워가 들어섰다. 지금은 없어진 종로서적 맞은편에는 초록색 3층 건물이 나온다. 기독교청년회관(YMCA) 왼편에 있는 장안빌딩이다. 이 빌딩을 오른쪽에 끼고 골목으로 들어가면 김두한(金斗漢)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야인시대’의 배경이 되는 우미관이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극장으로 명맥을 유지했으나 오래 전에 간판을 내리고 지금은 나이트클럽으로 업종을 바꿨다. 어디에도 극장 우미관이 있던 자리라는 표시가 없다. 종로는 광복 전후한 시기에 좌우 대립의 거리였다. 1945년 8월 15일 밤, 이승엽을 비롯한 서울의 명망있는 사회주의자들이 이 빌딩에 모여들었다. 다음날 아침 장안빌딩 건물에 조선공산당 현판이 내걸렸다. 8월 18일에는 우미관에서 외곽조직인 공산주의청년동맹을 건립하며 조직확대를 꾀했으나 박헌영 일파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조선공산당 창당을 선언하자 8월 24일 자진 해체한다. 단명으로 끝난 이 공산당을 ‘장안파’라 부른다. YMCA 옆 골목은 1970년대 말까지 유명 단과학원이 밀집해 있던 골목이었다. 제일학원, 서울학원, 경복학원 등이 이곳에 코를 맞대고 있었고 인사동 입구에는 종합반 정일학원이 있었다. 종로 2가와 인사동 사이 그러니까 우미관 뒤편에는 한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처마와 처마 사이로 두 사람이 겨우 지날 정도의 작은 골목길들이 나 있다. 1930년대 천재 작가 이상(李箱)은 기생 금홍이와 이곳의 한옥에서 잠시 살림을 차리기도 했다. 1970년대 이 골목길 고샅고샅에 수많은 독서실(지금의 고시원)이 똬리를 틀고 있었고 지방 출신의 학생들은 향토장학금으로 백반집에서 밥을 사먹으며 청운(靑雲)의 꿈을 키웠다. 지난 6월 4일 한국이 월드컵 진출 48년 만에 폴란드를 꺾고 첫승을 거둔 날, 종로에서는 71년 역사의 종로서적이 부도로 문을 닫았다. 1980년대 양우당이 문을 닫은 뒤에도 향락과 소비의 거리가 된 종로 2가(YMCA 건너편)에서 꿋꿋한 모습을 보여왔던 종로서적이었다. 종로서적은 문화 공간 역할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로 애용되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공무원시험 준비학원으로 전락했다. 추억마저도 부도가 나버린 것이다. 종로서적 뒤편은 한때 외국어 학원가로 이름을 날렸으나 이마저도 국적불명의 천박한 상업주의에 휘둘려 사라질 위기에 있다. 종로서적 뒤편 길은 1970~80년대 서울의 대표적 젊음의 거리였다. 지금의 강남역 교차로나 압구정로 로데오거리가 종로 2가였다. 이곳에서 눈여겨 봐야 할 곳은 시네코아 아트홀 뒤쪽에 있는 레스토랑 반줄(Banjul)이다. 건물 외벽부터 실내 장식까지 품격과 전통이 느껴진다. 유명 정치인과 문화예술인들의 오랜 사랑방이었다. 날로 천박해져가는 세태에 맞서는 종로의 자존심이다. 종로 3가로 건너가면 3·1운동 기념공원인 탑골공원(일명 파고다공원)을 빼놓을 수 없다. 불심 깊은 세조가 창건한 원각사가 이곳에 있었고 연산군이 집권한 뒤에는 스님들을 내쫓고 관기(官妓)들의 합숙소로 만들었다. 13층 불탑이 있다해서 불탑을 뜻하는 파고다공원으로 불리다가 1991년 10월부터 옛 지명을 따 탑골공원으로 개명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탑골공원은 갈 곳 없는 노인들의 쉼터로 알려졌다. 노인들을 상대로 성(性)을 파는 ‘바카스 아줌마’도 기생했었다. 기미독립운동을 되새기는 신성한 역사적 장소가 잡상인들이 물건을 팔고 장기를 두는 노인들로 가득해 안타까움을 갖게 했는데 지금은 잡상인 출입을 금지해 마침내 경건함과 엄숙함을 회복했다. 탑골공원에서 나온 노인들은 탑골공원 뒤편과 종묘 앞 종묘공원으로 이동했다. 허리우드극장이 있는 낙원상가와 반원꼴로 휘어지는 공원 담길 사이는 속칭 ‘노인의 거리’가 되었다. 70대 노인 이발사가 2000원 받고 머리를 깎아주는 난전 이발소도 세 곳 있고, 노인 상대의 식당과 노점, 좌판이 담벼락을 따라 이어진다. 이곳의 식당들은 콩비지, 옛날개장국, 순두부 등을 파는데 값은 2000원대. 날이 따뜻해지면 이 좁은 골목은 노인들로 발디딜 틈 없이 꽉 찬다. 2000원 점심값이 없는 노인들에게는 탑골공원 원각사 노인 무료급식소에서 점심을 제공한다. 탑골공원 담이 끝나는 지점에는 옛 파고다극장이 보인다. 지금은 파고다고시텔로 바뀌었지만 1970~1980년대 파고다극장은 재개봉관으로 명성을 날렸다. 동성연애라는 말 자체가 금단(禁斷)의 언어에 속하던 1970~80년대 이곳은 갈 곳이 마땅치 않은 동성애자(게이)들이 외로움을 달래는 장소로 유명했다.
▲ 한미은행 앞 민영환 순국 조형물,탑골공원 내 13층 석탑
‘잎 속의 검은 잎’의 시인 기형도(奇亨度)가 1989년 스물아홉의 나이로 요절한 곳이 이 파고다극장이었다. 당시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였던 기형도는 마지막 영화를 보다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 그는 좌석에 앉아 마치 잠을 자는 사람처럼 고개를 떨군 채 극장 청소를 하는 아줌마에게 발견되었다. 기형도는 유작시 ‘잎 속의 검은 잎’에서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고 노래했었다. ●사창가 ‘종삼’은 이상 ‘날개’의 배경 탑골공원 건너편 종로 3가 버스정류장 쪽에 아트박스가 있는데, 이곳은 일제시대 ‘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朴寅煥)이 책방 ‘마리서사’를 열었던 장소다. 종로3가는 사창가 ‘종삼’으로 더 유명했다. 피마길을 중심으로 조선시대부터 들어선 홍등가가 현대로 오면서 종삼으로 불렸다. 종삼은 양동(서울역), 588(청량리역)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 사창가로 자리잡았으나 1968년 일명 ‘나비작전’으로 불리는 사회정화사업에 의해 쫓겨나갔다. 종삼은 특히 문인, 예술인, 기자 등 이른바 ‘먹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자주 애용했다. 자유연애가 어려웠던 시기에 수많은 청년들은 종삼에서 ‘총각’을 떼곤 했다. 종삼은 많은 소설 속의 배경이었다. 이상의 ‘날개’와 ‘봉별기’도 종삼의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했고, 김성종의 소설 ‘어느 창녀의 죽음’(1977년·남도)도 1960년대의 이곳을 배경으로 그려졌다. 비록 종삼은 사라졌지만 종로3가 뒷골목들은 그 옛날의 종삼 분위기를 발산한다. 종로 3가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극장가(街)로 이름을 날렸으나 강남을 중심으로 무섭게 확산되어가는 복합상영관의 위세 앞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결국 피카디리와 단성사도 복합상영관으로의 변신을 위해 공사가 진행 중이다. 일찌감치 복합상영관으로 바꾼 서울극장은 여전히 관객들의 줄이 이어지고 있다. 옛 파고다극장에서 현재 공사 중인 피카디리극장 사이에는 돈의동이 있다. 강북의 몇 안되는 쪽방촌이다. 처음 와본 사람은 ‘종로 한복판에 이런 곳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루하루의 생계를 힘겹게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두세 평의 공간에서 생활한다. 어느 사회나 빈민은 있게 마련이지만 이곳에 와보면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깨닫게 된다. 종로의 이미지는 혼재와 공존이다. 한일관 옆 피마길에서 보면 ‘톱 클라우드’를 정수리에 이고 있는 초현대식 빌딩 종로타워가 보인다. 과거(조선)와 미래(21세기)의 절묘한 조화다. 수백년동안 역사의 풍파(風波)를 헤쳐온 종로는 마음이 넉넉해 누구도 배척함이 없이 다양한 연령층을 껴안고 적절히 공간을 배분하고 있다. 종로통에서 피마길의 전통을 지키며 생계를 꾸려온 사람들은 요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시 당국에서 고밀도개발을 추진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미 남쪽 피마길이 고밀도개발로 사라져버린 지금 북쪽 피마길마저 사라진다면 종로를 과연 종로라 부를 수 있을까. 종로에서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역사가 발길에 채인다.    ◆작가 이상의 ‘제비다방’을 찾아라 조선광무소 건물 1층이었다”기록만 남아 현 교보문고 뒤편 가능성 커  ‘…아랫방은 그래도 해가 든다. 아침결에 책보만한 해가 들었다가 오후에 손수건만해지면서 나가버린다. 해가 영영 들지 않는 윗방이 즉 내 방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볕이 드는 방이 아내 방이요, 볕 안드는 방이 내 방이요 하고 아내와 나 둘 중에 누가 정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불평이 없다.…’ 천재 작가 이상이 1936년에 발표한 소설 ‘날개’의 한 대목이다. 종로는 정치인들에게 ‘정치 1번지’로 불려왔지만 문인들에게는 문학의 고향이었다. 대한민국의 천재들은 전부 종로에 모여들었다. ‘날개’의 배경은 해가 들지 않는 서울의 33번지 유곽(遊廓)이다. 피마길에서 뻗어나가는 실핏줄 같은 골목길에는 21세기에도 ‘날개’ 속의 집들이 허다하다. 특히 종로 3가에 가면 그렇다. 피마길은 이상의 문학을 꽃피운 공간이었다. 폐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백천온천에 갔다가 금홍이란 여자와 운명적으로 만나 서울로 올라와 피마길에 제비다방을 차린 게 1933년 7월 14일. 금홍과 동거하면서 금홍을 다방 마담으로 일하게 하고 자신은 골방에 들어앉았다. 당시 문단에 커다란 충격을 준 ‘오감도’는 이상이 제비다방 골방에 앉아 벽에 깨알같이 쓴 낙서였다. 제비다방은 2년간 문을 열었다. 종로구 홍지동에 사는 소설가 오인문(吳仁文)씨는 수년째 ‘제비다방’의 터를 찾고 있는 사람이다. 오씨는 “제비다방의 제1후보지는 교보문고 뒤쪽이고, 제2후보지는 농민신문사 뒤쪽 피마길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상은 자신을 길러준 백부가 죽자 그의 유산을 정리하여 청진동 조선광무소 건물 1층을 전세내어 제비다방을 개업한다. ‘조선광무소 건물 1층에 있었다’는 사실이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교보문고 뒤편 피마길 골목에는 열차집, 전주집 등의 음식점이 몰려 있는 건물이 있다. 1960년대 초에 지어진 강한빌딩이다. 이 빌딩 2층에는 작은 방들이 대흥광무소, 대광광업기술조사소, 태산측량설계공사, 창일광산, 대래광업 등의 간판을 내걸고 미로찾기처럼 숨어있다. 강한빌딩 옆 골목 ‘종로구청 1길’ 안쪽에는 문화예술인의 단골 술집으로 유명한 ‘소문난 집’이 있는데 이 골목에도 한성광업기술조사소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이것으로 미뤄 이 골목은 제비다방이 세들어 있는 조선광무소 건물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제비다방은 오인문씨의 추정대로 교보문고 뒤편의 피마길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21세기 피마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집이 시인통신과 소문난집이다. 소문난집의 호는 삼경원(三驚苑)이다. 집이 너무 좁은 데 놀라고 단골 손님들이 명사들이라는 점에 놀라고 너무 싼 술값에 놀란다고 해서 삼경원이다. ‘지상에 마지막 남은 낭만의 섬’이라 불리는 시인통신은 피마길이 청진동길과 만나기 직전에 있다. 윤후명, 오인문, 김병총 등의 문인들이 단골 손님이다. 원래는 소문난집 자리에 있다가 10년 전쯤 이곳으로 옮겨왔다. 2층으로 된 시인통신 벽면은 낙서로 가득하다. 마치 이상이 제비다방 골방 벽에 써놓은 낙서와 흡사하다. 이곳에서 모든 술손님들은 친구가 된다. 만일 어느 손님이 통기타를 치며 독창을 시작하면 손님들이 합세해 금방 합창이 된다. 따뜻한 사람 냄새로 인해 가진 것 없어도 한없이 행복해지는 곳이 시인통신이다. (조성관 주간조선 차장대우 mapl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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