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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탐험/피천득]아이눈으로 찾는 생의 '작은 기쁨들'
"훗날 글 읽는 사람이 '사랑을 하고 갔구나'고 한숨지어 줬으면…"
학창시절 국어 교과서에서 만난 '수필' '인연' 등의 작가로 기억 하고 있는 수필문학가 피천득 선생은 서울 반포동 자택에서 부인(81) 과 단 둘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는 이달 29일에 만 89세가 된다. 우 리 나이로는 아흔이다.
10여년째 살고 있는 이 오래된 아파트 거실에는 놀랍게도 벽에 걸린 물건이 하나도 없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모든 것이 바닥에 놓여있었다. 전화와 몇권의 책은 물론, 그림액자 벽시계까지 전부 한쪽 벽에 기댄 채 마루 바닥에 붙어 있다. 탁자나 소파는 있지도 않았다. "옛날에 지어선지 벽이 상당히 튼튼해요. 거기다가 쇠못을 박으 려면 나 자신도 시끄럽고, 이웃에게도 소란스러울 것 같아서….". 정정한 비결부터 물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해 어느 점 치는 집에 갔더니, "여자를 멀리하면 60까지는 살겠다고 했는데 아마 너 무 멀리해서 90까지 사는 모양"이라며 소년처럼 웃었다. 수필에서 드러나듯이 그는 대단한 여성 예찬론자이다. 활자화된 70여 수필 곳곳에서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언급을 발견할 수 있다. <맑고 시원한 눈, 낭랑한 음성, 처녀다운 또는 처녀 같은 가벼운 걸음걸이, 민활한 일 솜씨, 생에 대한 희망과 환희, 건강한 여인이 발산하는, 특히 젊은 여인이 풍기는 싱싱한 맛, 애정을 가지고 있는 얼굴에 나타나는 윤기, 분석할 수 없는 생의 약동….>. 한마디로 <여성의 미는 생생한 생명력에서 온다>고 했다. "청승 맞거나 궁상 떠는 것을 싫어해요. 남자고 여자고 밝고 명랑한 게 좋 지 않나요?". -그런 여성을 동경해 오셨습니까. "사람에게는 1차 행복과 2차 행복이 있는 것 같아요. 내외간의 행복한 부부 생활이 1차 행복이라면 그 외의 것은 2차 행복이겠지 요. 사실 안사람과는 데면데면 하니까.". 너무 어렸을 때 어머니를 잃은 탓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7세에 아버지를, 3년 후 어머니를 여의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반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각별하다. <내게 좋은 점이 있다면 엄마한테서 받은 것이요, 내가 많은 결 점을 지닌 것은 엄마를 일찍 잃어버려 그의 사랑속에서 자라나지 못 한 때문>이라 적고 있다. 어머니라고 부를 기회가 한번도 없었기에 그에게는 늘 '엄마'이 기도 하다. 수필집 '인연'의 헌사도 '엄마께'다. 선생의 호 금아(가 야금 소년) 또한 춘원 이광수가 가야금을 잘 탔다는 어머니를 떠올 려 지어줬다. -젊은 시절의 '엄마'에 대한 기억 때문에 너무 눈이 높으신 것 아닙니까? (웃음).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워즈워스 셸리 키이츠 등 낭만주의 시인들 을 특히 좋아했어요. 절정에 다다라 있는 여성이나 자연의 생동감, 그러나 언젠가는 스러질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애틋함 등이 마음을 끌었죠.". 사실 피 선생의 조그마한 집필실에는 여성들 사진이 많다. 잉그 리드 버그만의 데뷔 시절과 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소피 무터의, 보기 에 따라서는 상당히 관능적인 연주 장면 사진이 특히 눈길을 잡는 다. 슈테피 그라프도 있었는데 "언젠가 그라프의 시합을 유심히 보 니 무척 침착하던데"라 했다. 피 선생은 옛 영화 '무도회의 수첩'을 본 따, 수첩에 좋아하는 여배우 이름들을 써놓고 있기도 하다. 요즘은 채시라와 명세빈이 목 록에 올라있다. 백수를 바라보는 어른께 실없는 질문이 과하다 싶어 수필 얘기로 옮기기로 했다.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선 생의 글 '수필'은 이 장르의 속성을 명쾌하게 제시한 글로 흔히 평 가된다.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 서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 뜻한 문학>이란 '정의'는 수필 쓰기의 어려움을 잘 드러내고 있다. "자기에게는 대단한 일일지 몰라도 그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의미있는 얘기일 수 있게 하기가 쉽지 않아요.".
수필이란 게 어찌보면 공개를 염두에 두고 쓴 일기 내지 편지인 셈인데, 제3자의 공감을 얻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가 '면도날' 만큼 얇단다. 자칫하면 너저분하게 신변잡사를 헤쳐놓은 요설이나, 억지로 짜낸 정서적 자기 위안으로 떨어지고 말게 될 것이라고 받아 들였다. 그럴 위험을 피할 묘책을 물었으나, "그게 한두 마디로 설명이 된다면야"하면서 "같은 말이라면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보다 짧게 쓰 는 게 효과적이긴 하다"고 했다. 또 글에는 문운, 즉 '글의 운'이란 게 있단다. 쓰고자 하는 바와 실제 일어난 일이 꼭 맞아 떨어진 경 우다. 아사코라는 일본 여성을 평생 3번 만나는 수필인 '인연'이 그 런 예다. -가끔 탐미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움에 집착하시는 것 같습 니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본성을 생래적으로 갖고 있어요.그 러나 언제든 짐승보다도 더 흉악해질 수 있는 게 또한 사람이지요. 물질 권력 섹스, 이런 것들은 인간다움을 단번에 훼손시킬 위력을 갖고 있어요. 소박한 것들에서 항상 기쁨을 찾는 게 정말 중요해요.". 그는 '순례'라는 글에서 <나는 작은 놀라움, 작은 웃음, 작은 기 쁨을 위하여 글을 읽는다. 문학은 낯익은 사물에 새로운 매력을 부 여하여 나를 풍유하게 해준다>고 썼었다. 아이같이 맑은 눈으로 심상한 사물의 새로운 의미를 일깨우는 그 의 글 중에는 의외로 상당한 교양 수준을 요하는 것도 적지 않다.
▲ 선생이 좋아하는 인물들 사진이 가득찬 서재에서. 책상 하나는 현재 미국 보스턴 물리학과 교수로 있는 딸 서영씨가 초등학교 때 쓰던 물건이다.
'기행소품'의 하나인 '아름다운 여인상'이 그러한데, 그리스 신 화와 프랑스 화가 제옴에 대한 기본 지식, 그리고 뉴욕 메트로폴리 탄 미술관을 한번이라도 방문해 본 경험이 있어야 본 맛을 제대로 알 수 있는, 원고지 2장이채 안될 깔끔한 글이다. 이는 영문학자로서 폭넓게 섭렵한 학문의 도움이 컸을 것이다.사 실 피선생은 그 연세에 필름 카페인 등의 'F' 발음을 정확히 구분해 사용했다. -작품 안쓰신 지가 오래됐는데요. "솔직하게 말하면 지난 내 글의 수준을 유지하기가 힘들기 때문 에 더이상 쓰지 않습니다. 나이 들면서 자신이 잊혀지는 게 두려워 자꾸 나서고, 했던 소리 또 하고 하던데 그러면 뭐 하겠어요.". 악머구리 끓듯 번설한 시대에 피 선생은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한 젊은이에게 순정한 삶의 태도를 수줍은 미소로 전하고 있었다.그 가 마지막으로 쓴 수필인 '만년'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하늘에 별을 쳐다볼 때 내세가 있었으면 해보기도 한다. 신기한 것, 아름다운 것을 볼 때 살아 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생각해 본 다. 그리고 훗날내 글을 읽는 사람이 있어 '사랑을 하고 갔구나' 하 고 한숨지어 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나는 참 염치없는 사람이다.>. (* 신용관 주간부 기자=qq@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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